2020. 4. 22. 16:22ㆍ선교학 강의
뉴 에이지 운동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들어가는 말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혼합주의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즉 현재 우리의 싸움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고등 종교보다는 다원주의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뉴 에이지 운동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무서운 혼합주의가 이미 우리의 코앞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비는 아무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뉴 에이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다고 할 때에는 교회 속에 엄청난 문제들을 유발할 수가 있다. 오늘날 점성술과 마술 같은 동양의 신비 종교들이 서구의 합리주의의 모순들을 점령해 가며 세력화하면서 종교의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제 점점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은 더욱 포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학문의 세계와 문화의 세계 그리고 종교의 영역 속에 급속도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는 서양의 발달한 문명의 상징처럼 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추며 자랑해 왔다. 그러나 서양의 정신 세계의 뿌리인 기독교의 정체성은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의 틀 속에서 인간의 신이 되는 현상을 만들어서 기둥과 같던 기독교의 뿌리를 흔들어 놓았다. 무너진 벽을 타고 이제는 동양종교의 사상과 세계관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고자 노력하는 부류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은 문화의 옷을 입고 우리 한국 땅에도 어느덧 상륙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뉴 에이지의 본질을 파악하고 우리의 성경적 대처 방안을 이 글을 통해서 제언해 보고자 한다.
I. 뉴 에이지 운동의 정의
뉴 에이지 운동은 일단의 종교혼합주의이다.. 이와 같은 혼합주의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 앞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세력들이다.
“뉴 에이지”라는 말은 물병자리 시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신비주의자들은 이 시대가 밝아오고 있으며, 이 시대가 동시에 깨달음과 평화의 시대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새 시대(New Age)에의 기대는 21세기로 접어들 때에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의 방출에 대한 기대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기대는 그동안 물고기자리(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에서 탈피해 물병자리로 이동한 것처럼, 서구 중심의 세계관이 비기독교 적인 세계관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믿고 있는 뉴 에이 지안들 속에는 신비적 경험을 강조하는 다양한 사교들이 있다. 이와 같은 사교들을 총괄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반 뉴에이지 운동을 감당하는 기독교 연구소들의 언급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종류들이 있다. 추월명상(MT), 라즈니쉬(Rajneesh)사교라즈니쉬(Rajneesh) 사교, 에캉카(Eckankar), 전 세계의 승리하는 교회(Church Universal and Trirumphant), 신적 광명 선교회(The Divine Light Mission), 등과 함께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 사이 바바(Sai Baba), 비바 람 다스(Baba Ram Dass), 마하리쉬 마헤쉬 요가(Mahareeshi mahesh Yoga), 구루 마하리쉬(Guru Maharijih)와 같은 여러 구루들의 추종자들이 현대 뉴 에이지 지도력의 본질을 구현하고 잇다. 또한 집단 감수성 훈련, 생명의 원춴(Lifespring), 실바 마인드 콘트롤(Silva Mind Control), 최고 연수회(Summit Workshops)로 예증되는 “인간 잠재력 운동”단체들과, 많은 다양한 전인적 건강 접근법들의 옹호론 자 들은 정확하게 뉴 에이지를 대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교들을 열거하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뉴 에이지의 혼합주의 적인 세계관은 그동안 서구 세계가 비 기독교적이라고 설정해 왔던 접신 술, 마녀신앙, 흑마술, 반기독교적인 사탄숭배 의식 에에도 비틀스에서 명상 음악까지, 고대의 점성술에서 현대의 양자 역학, 힌두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까지 쉽사리 공통점을 찾기 힘들 만큼 다양한 범주를 제시할 수 있다.
II. 뉴 에이지의 역사
뉴 에이지 운동의 역사에 앞서서 우리는 뉴 에이지의 뿌리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타락 속에 나타난 반 하나님적인 요소이다. 인간의 자만, 즉 모든 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잠재해 있다는 믿음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의 뿌리를 근간으로 형성된 종교들(바벨론 종교, 힌두교, 불교, 영지주의, 요가)이 모두다 뉴 에이지 운동의 뿌리라고 볼 수도 있다.
뉴 에이지의 사상이 어디에서부터 왔느냐의 문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 하나는 범신론과 힌두교에서 왔다는 설이 대종을 이룬다. 이와 같은 사상의 줄기를 타고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를 출발점으로 잡는다.
1960년대는 서구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의 시대였다. 당시의 미국은 쿠바의 문제, 베트남의 전쟁,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태,, 노동자의 파업, 젊은이들의 마약과 히피문화는 그동안 버팀목으로 자리 잡았던 기독교의 세계관을 흔들어서 동양의 신비주의가 점차 흥미 있는 종교가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고, 실존주의 세력이 점차 많아짐과 아울러 자유주의 물결이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알티저의 「기독교 무신론 복음」,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 플레쳐의 「상항윤리」「상항 윤리」등은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1962년에 있었던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아울러 종교다원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유일성 대신 신비한 동양 종교는 나 자신이 신이 되는 방법을 설파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뉴 에이지 운동의 실질적인 이론의 산실은 신지 학회였다. 였다 신지학회는 1875년에 창립되었고, 1882년 인도의 마드라스로 옮겼으며, 1907년에는 애니 비산트(Annie Besant) 부인이 지도권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뉴 에이지 운동의 실질적인 기초를 놓은 사람은 신지학 회의3대 회장인 엘리스 베일리(Alice Baily 1880-1949) 이다 그녀는 영국 출신의 여자 영매(靈媒)였는데, 그가 신접하여 받은 내용들이 비밀 원리로써 많은 문서에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뉴 에이지 운동의 지침이 되고 있다. 그녀의 저작들은 루시퍼 출판사(Lucifer Publishing Company)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회사는 1922년 루시 협회로 출발하여 세계에 뉴 에이지 운동을 보급하는 중요한 단체가 되었다.
III. 뉴 에이지의 세계관
서양의 세속적인 인본주의 운동이 뉴 에이지 운동의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내용상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뉴 에이지 운동의 세계관의 기초는 한마디로 무신론이다. 이러한 무신론의 뿌리는 인문주의자 선언문 I, II 를 들 수 있겠다. 이 선언문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다양한 분야에서의 뉴 에이지 세계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종교관
뉴 에이지 종교관은 동양종교 속에 있는 신비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관 속에는 기독교가 가진 창조주 하나님의 신관은 없다. 대체적으로 종교에 대한 정의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인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이러한 초 자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과학으로 초 자연성을 검증할 수 없으며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신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사고를 가진자들 속에 동양의 신비주의적 뉴에이지 운동이 정착되면서 급속도로 동양종교로 대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관이 들어오면서 인간에게 대한 새로운 구원관이 정립 되게 되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 타락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개념을 빌리자면, 원래 선하게 태어난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통한 구원은 해당되지 않으며, 구원이란 인간의 잠재력 즉 인간속에 있는 신의 힘을 개발함으로써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뉴 에이져들의 세계관은 인간이 죽으면 그 업보에 따라 환생한다는 윤회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내세관에는 물질, 생물, 인간 속에 잇는 신의 힘을 개발하면, 물질이 생물, 생물이 인간, 인간이 신으로 변형(Transformation)될 수 있다는 진화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인 요가에서는 인간이 삼매경에 빠져 신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말하기를
“마치 투명한 보석이 곁에 있는 꽃의 빛깔에 의해서 물들 듯이, 생각의 흐름이 멈추면 마음은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알려지는 대상, 아는 과정, 아는 자(자아의식)가 모두 집중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 상태를 삼매라고 한다(Becoming like a transparent crystal on the modifications disappearing, (the mind acqires) the power of thought-transformation (smapatti), the power of appearing in the shape of whatever object is presented to uit, be it the knower, the knowable or the act of knowing).”
이와 같은 개인적 신비체험을 통한 종교관과 아울러 그들은 종교통합도 서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촌 주의를 고집하고 있으며 진정한 세계 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을 종교에서 찾는다. 그들의 주장은 첫째, 세계정부 수립 없이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 둘째, 세계 정부에는 하나의 공동체 관념, 즉 세계 종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통합을 위해서는 신학논쟁 같은 것들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 뉴 에이 져들은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 모던 신학 같은 전통 기독교를 해체하는 부류들을 대화의 상대자들로 선호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뉴 에이지의 대부인 영적 진화론자 샤르댕이 발전시킨 뉴 에이지 사상의 주요 교리인 9가지가 모두 반 기독교적인 종교성을 담고 있다. 결국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은 과학주의와 무신론을 주장하고 뉴 에이 져들은 진화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구원관과 내세관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B. 인간관
뉴 에이져들의 인간관은 그들이 종교관에서 말하는 인간관과 다를 바 없다. 신학적 인론은이론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반하여 과학적 이론은 인간의 정신 및 육체적 유기체 및 자연적 역사를 다룬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도록 되어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끊어지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에게 죄성이 들어와서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어져 왔다. 따라서 인간은 보편적인 죄의 관점에서 누구도 선하게 태어날 수 없으며 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에 비하여 뉴 에이져들의 인간관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한 존재이며 수련을 통해서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신이다”라는 논리는 인간과 신의 합일을 위한 “새 세계 질서”를 위하여 인간과 신이 이원화되는 기존의 질서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 에이져들의 인간에 대한 인식은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그 신성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스와미 묵타난다(Swami Muktananda)는 “너 자신에게 무릎을 꿇어라. 너 자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라. 신은 너 자신처럼 네 안에 거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아트만이 부라만 이다”, 즉 개별적인 자아가 우주적 자아라고 간파하는 힌두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 왔건, 또는 “위의 것과 아래 것이 같다”, 즉 신과 인간이 하나라는 비교에서 왔건, 아니면 모든 지식, 능력, 진리는 내재하며 사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아실현을 말하는 심리학에서 왔건 간에, 뉴 에이지 운동은 ‘너 자신이 신’이라는 범신론의 기치를 높이 세운다. 결국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 시켜 버렸다.
C. 국가관
뉴 에이져들의 국가관의 목표는 세계의 단일정부의 구성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열거한다. “우리는 인류가 국경에 따라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개탄한다.” “세계 단일 정부는 국가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세계단일 정부는 고갈되어 가고 있는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처하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경제 성장과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는 이제 한 국가를 단위로 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
이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단일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로 집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통합은 단순히 환경이나 경제적인 요소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종교적인 통합 속에서 그 꿈을 실현시키고자 노력을 한다. 따라서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종교의 다원화를 주장하며 절대적 진리란 한 종교만이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해서 통합된 진리를 상호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그들의 전략은 기독교를 세속화시키려는 적 그리스도적인 저의가 깔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IV. 뉴 에이지 운동의 열 가지 교리
뉴 에이지 운동의 세계관은 범신론적인 동일 철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일철학의 특징은 현상계의 차별성이나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만물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 혹은 우주와 동일화되는 것이 곧 인간의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뉴 에이지 사상은 이와 같은 동일 철학에 근거하기 때문에 불교의 “공(空)”이나 장자의 “천균(天均)”사상 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대립하는 사물들의 대립성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뉴 에이지 사상에서는 선악의 구별이 없어지고, 죄의 개념이 없음은 물론, 인간이 신과 동일시되는 합일의 개념이 돌출된다..
따라서 필자는 뉴 에이지 운동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 중에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열 가지의 기본 교리를 월터 마틴 박사의 지론을 빌려 열거해 보고자 한다.
A. 하나님
타라 센터의 창설자이며 중요한 뉴 에이지 서적인 「그리스도의 재현과 지혜의 스승들(The reappearance of the Christ and the masters of wisdom)」을 썼던 벤자민 클레임은“그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에너지 형태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 있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한다... 만물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이므로 온 우주 자체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신이며, 우리는 신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의 영적인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하고 진정한 신이 되고, 또한 신이 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존재가 신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며, 존재하는 것 가운데 신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결국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 에이지 신관을 필자는 철저히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에너지의 형태나, 힌두교에 나타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 안에 가두어 두는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창(창 1:1), 스스로 계신 자존자(출 3:14)이시며, 인격적이신 분(요 4:24)이 시기 때문이다.
B. 삼위일체
“영원한 사고는 하나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둘이니 지성과 힘이다. 이 둘이 숨 쉴 때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이 아이는 사랑이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겨났으니 그를 인간들은 아버지-어머니-아기라고 칭한다”
이와 같은 뉴 에이지의 삼위일체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교리는 자연신학의 진리가 아니라 계시의 진리이다. 먼저 3위 11체란 의미는 한 신적 본질 속에 3개의 영원한 구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하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뜻한다. 세 위는 동일하시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먼저, 아들을 둘째, 성령을 셋째로 배열하는 것에 대해서 무시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열은 영광과 능력이나 또는 존재의 기간성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순서를 그렇게 한 것뿐이다.
C. 예수 그리스도
많은 뉴 에이지 추종자들로부터 예언자로 여김을 받았던 데이비드 스팽글러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모든 생명 안에는 하나의 자질, 하나의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 에너지는 기본 특성으로 억누를 수 없는 성장, 억누를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신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형태든지 나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자질이다. 나는 그 형태에 의해 감옥에 갇힌 자로 붙잡혀 있지 않고 보다 위대한 형태로 변형시킬 것이다. 나는 모든 생명, 모든 경험들을 보다 위대한 신성의 계시들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천지만물 내에 있는 기본적인 진화의 힘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에너지의 변형을 통한 진화된 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인성(마 1:18-2:12, 롬 1:3 등등)과 신성(고전 2:8, 마 1:21, 요 3:13, 롬 9:5 등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분이시다.
D. 구속
데이비드 스팽글러는 말하기를 “이것이 참된 십자가이다. 십자가 처형은 예수를 물리적 십자가에 매달았다기보다는 혹성 본체 자체의 물리적, 영기적(靈氣的),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 모범들에 우주적 그리스도의 입장이었다. 이 시점 이후부터 그리스도는 더 이상 혹성밖에 서서 진화를 유도하는 힘이 아니라 혹성 자체의 구조 안에서 활동하는 매우 강력한 힘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에 빠진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친히 죄인들이 지고 죽었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육신의 주요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목적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를 구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 구원
많은 사람들로부터 뉴 에이지 여선지자로 여기며, 인류의 영적 운명이 승천한 스승들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신지학 교리에 서명한 앨 리그 베일리는 말하기를 “오늘날 구원의 동기는(구원받았다고 가정하거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개인적 구원 개념에서 변화하고 있고 요구되는 준비는 바른 인간관계들을 갖기 위해 용기와 이해를 가지고 힘쓰는 것이니 곧 보다 넓은 목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니라 각 개개인의 노력가와 박애가를 신령한 성직자의 반열에 세워 모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화합하게 하는 동기를 여기에서 갖게 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보다 넓은 의미의 구원을 위해서 타인들과 화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할 수 있고,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F. 천국과 지옥과 최후의 심판
뉴 에이 져들은 천국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서 절대로 천국을 만들지 않았고 지옥도 만들지 않았다. 우리가 창조자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 지옥을 믿고 자신을 지옥에 보내는 자들은 분명히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영원한 지옥 같은 것은 없다. 어떤 영혼도 영원히 무지하지 않다”
이와 같은 그들의 주장은 환생의 개념 아래서 천국을 말하는데 기독교의 천국을 제거하는 대신 불교의 열반으로 대체해 버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분명히 언급하여 믿는 자 들이 가는 곳은 천국으로 불신자들이 가야 할 곳은 지옥으로 분명히 묘사되고 있다(마 25:46).
G. 악마적 능력들
스팽글러는 말하기를 “인간이 자기 자신의 구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사단이다. 그러나 루시퍼의 에너지들이 이 사고 형태를 만들게 됨으로써 루시퍼, 또는 그림자 루시퍼는 이 사고 형태와 동일시될 수 있고 여기에 혼란이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이 집단적 사고 형태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는 이 그림자를 넘어 인간의 마음속 세계에 빛을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는 참된 빛의 천사를 볼 수 있다”
뉴 에이지 저자들은 루시퍼 같은 타락한 천사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성경의 사단에 대한 내용들을 차용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악마들은 이들이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엡 2:2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요 8:44에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라고 묘사되고 있다.
H. 그리스도의 재림
스팽글러는 말하기를 “매우 현실적인 의미로 파인드혼(Findhorn: 스코틀랜드 뉴 에이지 공동체)은 재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로운 것들을 구현함으로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것들을 이끌어 내는 자력의 근원이 되는 어떤 개인이나 어떤 센터나 재림을 구현하는 것이다”
뉴 에이 져들에 의하면 지상에 이미 그리스도가 재림하셨으며, 그 모체는 파인드혼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허구이며, 아무런 논평할만한 가치가 없다. 기독교내에서도 재림에 관한 다양한 학설들이 상존한다. 즉, 전천년설전 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이 그것이다. 물론 어느 학설을 취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가 하는 것은 교파들 마다 다르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으므로(마 24: 42-43) 도적같이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I. 환생
베일레이는 말하기를 ““이때에 그는 인간들에게 이 가능성이 완벽한 사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곧 땅의 삶의 학교로 환생하는 영혼의 부단한 귀환을 통하여 땅에 그가 뛰어난 예가 되었던 완성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환생의 의미와 가르침이다” 영혼은 자신의 카르마(Karma: 업,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발전하거나 퇴보한다. 동양종교들의 환생은 인간고 통의 윤회를 통한 재탄생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 하지만, 뉴에이지에서는 환생을 무한한 진보를 위한 기회로 보고 그 가르침을 진화론적 낙관론에 결합시킨다.
뉴 에이지 신봉자들은 천국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악의 문제와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의에 대한 상급은 ‘윤회’의 개념에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윤회 사상은 운명론과 숙명론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들은 천국 대신에 인간의 모든 영혼은 결국 위대한 세계의 혼으로 흡수되는 불교의 사상인 니르바나(열반)로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 그들은 지옥이란, 이생에서 나쁜 카르마의 형태로 거두는 것이며 이것이 과거에 저질은 죄에 대한 형벌이며 심판이라고 한다. 결국 이들의 윤회설은 범신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가르침은 기독교가 말하는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어 주님과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진리와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윤회사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J. 뉴 에이지
뉴 에이 져들은 이 시대를 물병자리 시대로서 이제 위대한 시대가 도래될 것이라고 한다. “물병자리 시대는 위대한 영적 시대이다. 그리고 예수가 세상에 제시한 위대한 교훈들의 영적인 면이 이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이제 영적 의식의 진보된 단계로 나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뉴 에이 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점성술에 기인한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점성술은 인간의 미래를 천궁도를 가지고 예언한다. 현재 서양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점성술인 ‘호로스코프’‘호 로스코프’는 개인의 운세를 점치는 숙명 점성술로써 인간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12개로 나누어서 태양, 달, 다섯 혹성의 위치 관계를 적용하여 해석하는 점성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점성술은 성경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첫 번째 이유는, 점성술의 이론은 지구중심설(Geocentric Theory)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성들은 지구중심이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태양중심설(Heliocentric Theory)이 타당한 이론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교주의는 자연을 섬겼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다. 물론 성경에서도 하늘의 별에 대해서 많은 구절들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숭배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별을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믿음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뉴 에이지들이 말하는 10가지의 교리들을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을 집성하여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연구에서 뉴 에이져 들의 사상이 얼마나 혼합주의적이며,, 비성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이 세상이 종말을 향하고 있는 역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제 종말이 가까울수록 적 그리스도들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이 시대를 알아 미혹의 영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V. 뉴 에이지 운동의 다양한 활동들
뉴 에이지 운동은 일정한 규모를 갖추거나 일괄성 있는 사상 체계를 세워서 나가는 집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뉴 레이저를 확실하게 잡아낸다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새 우리 주위의 많은 영역에 이미 뉴 에이지의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대중 매체를 통해서 점점 그 활동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주요 회사에서의 적 그리스도적인 사고로 대별되는 강의들, 광범위한 뉴 에이지 사상을 담고 있는 어린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세계 평화를 앞장세운 정치적인 집단까지 앞으로는 점점 더 양성화된다고 진단해 볼 수 있겠다.
우선 표면적으로 나타난 몇 가지의 실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건강요법들
건강을 염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다양한 건강 관리법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이러한 건강관리법 가운데 요가, 기공, 같은 심신 술을 통한 건강관리법들을 일단은 경계해야 할 줄 믿는다. 이는 단순한 건강관리를 벗어나서 일정 시점에 이르면 반드시 종교적인 부분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가란 육체와 정신 또는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뜻한다. 요가는 유한한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실재, 곧 신성과 결합하기 위한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완전한 요가의 상태에 이르면 신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최근 서울 시내에만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단학 선원 같은 신체 수련원을 보게 된다. 이를 신과학이라는 논리 아래에서 놀랍도록 확대되어 가고 있다. 즉, “단(丹)이나단(丹) 기(氣)는 고조선 때부터 신라 화랑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고유의 수련법이었는데 최근에 이르러서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되는 건강 요법이다”라고 300여 개의 선원을 운영하는 관계자가 이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신인합일을 주장하는 운동들이 우리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건강요법들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건강 요법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대안에 대해서 낮은 울타리 문화연구소 강진구 소장은 “소위 뉴 에이 져들이 즐겨 사용하는 기, 선, 요가 등의 건강만이 최선이 될 수 없음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처음에는 단순한 건강 요법들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정신을 컨트롤하게 되어 결국 진공 상태에서 사단의 침투가 불가피하게 됨을 인식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B.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영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영의 세계의 의사전달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들로부터 끊임없이 인도를 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는 영은 인류 속에서 유익을 얻어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매인 제인 로버츠는 그녀를 통해서 셋(Seth)의 힘으로 책들을 출판했는데, 특히 우주의 비밀에 관한 책들을 출판하였다. 안내자로서의 영이란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통로나 다른 영적인 에너지들을 위한 통로로 선택되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매개 역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뉴 에이지 신봉자들은 악령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것과 인간이 믿기를 바라는 것을 가르치고 믿는다. 그들의 많은 행위들도 악령들의 세계로부터 지시받은 대로 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뉴 에이지 운동의 가르침과 행위들은 단순히 인간이 깨달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악령들이 계획적으로 인간에게 계시함으로써 그들이 받아 사용하게 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심리학적인 원리와 영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인간이 깨달아 발견한 것같이 보인다. 이와 같은 악령들은 뉴 에이지의 세계관을 믿게 하기 위해서 강신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강신술의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강신술은 영적 혼합 상태를 사단이 이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신술은 죽은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라, 악한 영들이 사람들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강신술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이 말씀을 박윤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이 여기고 접 신술사 에게 난 문제를 묻는 풍속을 정죄하여 꾸짖는 다음 의 네 가지 것을 말한다. 첫째,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난제를 하나님께 물어봄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둘째,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심판을 받고 갈 곳으로 갔으며 생명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일에 지침으로 생각하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다. 누구든지 환상이나 꿈을 숭상하면 잘못이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을 최고의 권위로 알고 가르치는 자들은 마침내 암흑과 비운을 당할 것이 다.”
이처럼 강신술은 비 성경적일 뿐만이 아니라 많은 위험이 따른다. 성도들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가 계시해 놓으신 말씀의 토대 위에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야 한다.
C. 영상화
영상화는 외부 물체에 대한 마음(mind)의 통제 기법 중에 하나이다. 성공을 영상으로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을 통하여 그것을 실현시키도록 격려받는다.. 이러한 영상은 염려 작용(psychokinesis),(psychokinesis), 또는 심령 종합, 환타지, 상징 , 의지력, 암시를 통한 의식개발을 통하여 마음을 통제하는 기법을 쓰고 있다. 이러한 영상화는 심지어 암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D. 신 과학운동(新 科學 運動)
신 과학 운동이란 “유기체론”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뉴튼과 데카르트에 의해서 확립된 기계론적이고 이원론 적인 근대 자연 과학적 세계관인 기계론적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전체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며 전체는 부분 상호 간의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연구한 뒤에 종합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한다.
신 과학 운동은 먼저 현대 물리학의 업적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고전 물리학의 세계관에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형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기본적인 고체 미립자로 형성된 물질적 실체가 이러한 절대적인 시공 안에서 엄격한 인과율에 따라 운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은 이러한 인과율을 추적함으로써 관찰자인 주관과는 무관하게 대상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에서는 서로 분리된 형식으로서의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속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고,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을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상대성, 사물에 대한 과정 철학적 이해, 전체적 사고방식,, 주관과 대상의 상호작용 등은 동양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공(공), 무상(무상), 무아(무아)의 개념과 도(도)의 개념, 기(기)의 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에 상응하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신 과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서 동양 사상과 현대 자연 과학의 성과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신 과학 운동의 사상들은 70년대 미국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반도에 까지 밀고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중앙일보 김인곤 기자는 “신과학은 서양인들에게는 종래의 정태적인 세계관과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극복한 새로운 가치체계이다. 그러나 잠시 서구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빠져 있던 동양 사람들에게는 전통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다”
신 과학 운동 연구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데이비드 봄(David J. Bohm 1916 -)은 “숨겨진 질서”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물은 분할이 불가능하며 운동하고 있는 전체라고 본다. 즉 감각으로 감지되는 현상은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으로 보이는 것들은 각각 따로따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숨겨진 질서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인도 사상이나 불교의 사상과 상응하는 바가 매우 많다. 감지되는 현상을 환각으로 간주하는 봄의 주장은 인도 사상에서 말하는 ‘마야(Maya)’의 개념을 상기시킨다. 봄의 말하는 ‘숨겨진 질서’는 불교의 ‘공(空)’ 혹은 ‘연기(緣起)’의 질서에 상응하며, 숨겨진 질서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불교에서 말하는 ‘법주(法住)’의 개념과 상응한다.
이러한 신 과학 운동의 영역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은 의학으로써 생물학의 영역에서 유기체론을 들 수 있다. 이는 중국 의학의 기 사상과 유기체적 세계관을 토대로 한 의학으로서 신체의 여러 기관들, 정신과 신체, 신체와 환경을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전통의학은 부분적인 치료를 중시하는 반면에 신 과학의 의학은 전체적 치료를 중시한다.
이와 같은 신 과학 운동들은 우리나라 속에 이미 제도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6년 9월 24일, 정신과학과 신고학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정신과학연구소’가 재단법인 설립 신청을 하였는데 논란이 있은지 일주일 만에 법인화하였다. 1997년 7월 23일 국회의원회관 소 위원실에서 열린 ‘신 과학 기술개발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통해서 입법적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대학가에서는 ‘풍수 지리학, 수맥학, 기학’등등이 인기를 끌고 있음을 보면서 신 과학 운동이 어느새 우리의 코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VI. 한국에서의 뉴 에이 운동
한국에서의 뉴 에이지 운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 어디에 미치고 있는가. 이 부분에 있어서 우선 정확한 통계를 잡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복음주의 교회들 속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가끔 나올 뿐이다. 이러한 우려 섞인 목소리는 ‘낮은 울타리’의 대표인 신상언 씨의‘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하였다’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불붙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에 흥미 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뉴 에이지 운동”에 관한 찬반양론의 지상 대결이었다. 즉 , 대중문화 속에서 기독교 문화를 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낮은 울타리(대표: 신상언)와 영화 평론가이며 빛 연구소 대표(신태균)와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기독교 잡지인 「복음과 상황」에서 1992년 11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지상 논쟁화 되었다.
필자는 이 논쟁을 객관적 입장에서 정리해 보면서 우리의 뉴 에이지 운동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A. 사탄은 대중문화를 선택했는가
먼저 신태균 씨는 위의 재목에 - 뉴 에이지, 그리고 반 뉴에이지 운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판 - -이라는 부재를 달아서 뉴 에이지 운동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신태균 씨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뉴 에이지 운동의 비판은 뉴 에이지의 실체를 잘 모르고 공격하고 있다. 즉, 반 뉴 에이지 운동자들이 일방적으로 내어놓은 몇 가지의 외국 자료에 의해서 비판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잇다. 이러한 한 가지 예는 반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인용한 자료인 “신 지학회”와 “악령의 지침서”같은 자료들은 어느 누구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둘째, “물 병아리 음모”는 점성술가 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자료다. 따라서 비 과학적인 말장난에 불과한 점성술에 과민한 기독교인들은 세차 운동과 춤 분점에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셋째, 뉴 에이지는 미국의 반항 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항은 부패한 교회에 회의를 품은 젊은이들은 신앙 대신에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고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을 기반으로 하는 전 인류의 공영을 갈망했다. 이러한 갈망이 결국 기성세대를 반대하는 뜻에서 뉴 에이져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뉴 에이 져는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가진 서태지와 아이들을 들 수 있다.
넷째, 반 뉴 에이 져들은 기독교의 “이신칭의”의 신앙에 위배되는 점성술, 마녀사냥, 접신 술이 최초의 뉴 에이지 범주로 일부 기독교인들의 사이에 지목받으면서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다섯째, 용어의 사대 성을 말했다. 이는 본래는 동양적인 것들(점성술, 굿, 영매 술 등등)이 이제 뉴 에이지 운동이란 옷을 입고 역수입되고 있다.
여섯째, 무차별적인 배타성이다. 뉴 에이지의 사상적 배경은 고대 동양종교에서 동양의 신비주의, 현대철학, 공상과학, 및 과학, 50년대와 60년대의 반항 문화 등을 들고 있다. 결국 반 뉴에이지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배제한 모든 종교, 사회 ,철학, 학문, 예술을 무차별적으로 뉴 에이지 문화로 몰아서 적 그리스도로 몰아붙이고 있다.
일곱째, 문화적 대안이 없이 무조건 모든 것을 뉴 에이지로 몰아붙이는 것은 대안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덟 번째, 한국의 그릇된 대중문화 형성은 미국의 문화 상업주의와 한국의 친미 교육정책의 책임이 크다.
B. 사탄은 대중문화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이 글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낮은 울타리”의 92년 12월호를 통해서 신태균 씨의 글을 반박하게 되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태균 씨는 뉴 에이지란 용어가 사대성 이거나 일부 점술가의 말장난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솔직히 뉴 에이지란 용어의 발생 원인과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어느 정도 배타성을 본인도 인정하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현상이지 단어가 아닙니다. 뉴 에이지 운동은 과거의 신비주의나 바알, 앗세라 신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데 사회의식이 없다는 말로 문제의 중요성을 흐리게 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뉴 에이지는 위에서 말한 요소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주장한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예술이나 문화, 삶의 모든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이나 죄 악성,, 부적합 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가 필요하며 회개한 이후에 더 경건해야 하는 당위성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왜 현대의 대중문화(특히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에서는 더욱더)를 사탄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탄적이라는 용어는 신비주의나 광신 주의자들 만이 사용하는 용어는 아닙니다. 서구의 교회가 몰락한 큰 원인이 교회의 세속화에 있다면 무차별한 배타성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사탄은 대중문화를 철저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에서부터 이루어져 온 음모입니다.”
C. 문화에 대한 메커니즘,, 반 뉴에이지 운동
“낮은 울타리” 12월호를 읽고 난 신태균 씨는 “복음과 상황” 1993년 1월호를 통해서 신상언 씨의 글을 반박하였다. 그는 이번 글에서 신상언 씨야 말로 작가정신과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작가정신의 실종에서는 “신상언 씨는 뉴 에이지 용어의 생성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정확한 자료를 무책임하게 인용하여 대중을 미혹했다”라고 말했다.
둘째, 사회적 외면에 대해서는 “신상언 씨는 반 뉴에이지 운동가들에게 진지한 토론을 기대했던 “뉴 레이저 문화”를 사탄의 문화로 몰아 버림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였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다소 감정적인 어투의 신태균 씨의 공격에는 “문화창작”의 창조적 위축과 아울러 “영화 비평의 결여”를 들어서 대안 없는 비판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D. 뉴 에이지 운동
이렇게 되자 「복음과 상황」에서는 1993년 9월호에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잡지에서는 신상언 씨의 글을 새로 싣고, 신태균 씨의 글도 요약정리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신상언 씨는 자신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나의 실수는 뉴 에이지를 직접 조사하지 못하고 남이 연구해 놓은 것에서 정보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뉴 에이지를 설명하면서 신태균 씨가 비판한 ‘신지학회’나 ‘물병자리 음모’에’ 가장 먼저 몰두하게 된 것도 사실 확인의 차원 이라기보다는 이 운동의 근원에 대해 나름대로의 객관성을 유지해 보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의도는 진보적 기독교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만 해도 끔찍한 극단적 종말론자로 보였을 것이 당연하다.”
계속해서 신상언 씨는 신태균의 공격에 대해서 반박하였다.
첫째, “작가정신의 실종에 대해서” 는 다음과 같이 변증을 하였다. “미국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료들을 이용하여 자료를 정리하였고, 국내에서도 ”신앙계“의 함태경 기자가 뉴 에이지의 뿌리를 프리 메이슨의 정체까지 밝힌 사항이기 때문에 ”작가정신의 실종“의 공격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둘째, “사회문제를 외면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신상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이 뉴 에이지 문화로 들끓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알려야 하고 안내를 하며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라고 반박하였다. 그의 이러한 고발 정신은 “뉴 에이지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사회현상과 맞물려 새로운 종교로 급속히 번져가고 있으며, 구원 다원주의, 신인합일, 초능력 강조, 자살과 파멸로 이끄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뉴 에이지 운동이 결국은 사탄 숭배교로 발전할 것이라는 증거가 오늘날 미국에 의해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위의 두 분이 각각 자신의 논리를 펴면서 ‘뉴 에이지 운동’의 대처 방안을 논쟁하는 모습을 보았다. 뉴 에이지의 본질적인 사상은 분명히 혼합주의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과는 대립된 관계 속에서 한국 땅에 착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문화의 옷은 입고 서있지만 복음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모든 삶의 영역 속에 파고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신태균 씨의 많은 변명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을 포함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혼란한 사조를 퍼뜨릴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도전의 극복을 위해서 다음 장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VII. 뉴 에이지 운동의 대처 방안
지금까지 필자는 뉴 에이지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열거하였다. 이제는 이러한 운동들을 어떻게 저지하고 방어하며 나아가서는 그들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인식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우리의 과제라고 여겨진다. 이양림 교수는 대처 방안으로서 “사탄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뉴 에이지의 요소들을 예리하게 분별해 내는 일이며, 이것은 특별히 영적 은사에 따른 분별 이라기보다는 말씀의 내용을 분명히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뉴 에이지 운동의 본질과 정체를 정확히 규명해 낼 때에만이 성실하고 체계적인 비판을 수행할 수 있으며, 바람직한 기독교적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하나를 더한다면,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정체성의 확립이란, 기독교 세계관 정립과 아울러 교회의 변혁 운동을 들 수 있겠다. 어떤 의미에서 앞으로의 기독교의 싸움은 혼합주의와의 싸움이다. 따라서 복음의 배타성은 기독교의 절대적 정체성에 둔다면, 포용주의는 문화적 요소들의 수용 내지 극복에 둘 수 있다 하겠다. 이제 필자는 뉴 에이지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써 다음의 몇 가지를 열거해 볼 수 있겠다.
A. 뉴 에이지의 본질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국병 속에 크나큰 것 중에 하나가 외국 것이라고 하면, 무분별하게 받아 드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수 없이 많은 병패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사대주의적 사고 가 팽배하므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받아 드린다. 뉴 에이지 운동의 한국 내 확산도 무분별한 외래 선호 사상 가운데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뉴 에이지의 본질적인 문제를 분석하여 저들이 가지고 있는 반 성경적인 전략들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뉴 에이지의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뉴 에이지의 침투 통로 가운데 가장 무섭게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 명상 서적이나 영지주의적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80년대 초부터 기독교의 교리나 사상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새로운 장르의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명상서적은 인도의 신비주의와 이슬람 신비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기존의 가치관과 내면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인간 자체의 노력에 의하여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즉 이들의 신관은 범신론적이며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다.. 이와 같은 명상 서적이 국내에 소개된 것이 1978년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83년에 라즈니쉬의 「사하라의 노래」 「마하무드라의 노래」등이 번역되면서부터 였다. 이들은 80년대 초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탈출구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초현실적인 피안을 제공함으로써 호응을 얻게 되었고 오히려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그 후 ‘배꼽 시리즈’로 대표되는 명상 서적은 책 전역에 걸쳐서 반 기독교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배꼽」의 경우 책 곧 골에 기독교의 신앙관, 윤리관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을 조소하는 문장들이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란 것 역시 우리의 교활한 발명품이다’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 있다면 그대는 신과 일치할 것이다’ 등등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부인해 버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꼽 시리즈’ 외에도 「성자가 된 청소부」「꼬마 성자」 「빠빠라기」 「동냥그릇」 「느낌」「어느 꼬마의 마루 밑 이야기」 등의 책들은 기존의 가치관과 윤리의 규범의 틀을 깨뜨리고 난 뒤의 비현실적 감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책들이 반 기독교적인 서적의 대표성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이제 신학계 내에서도 뉴 에이 지적인 많은 글들을 접할 수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를 대변하는 글들이기도 하다. 앨런 왓츠는 기독교의 참다운 생명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체로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 속에 포함시켜 버림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을 도말시켜 버린 경우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서적들로는 영지주의적 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이론을 정립하였는데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논리의 이론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옛 바빌론,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 이른바 동양종교 사상과 신화 그리고 옛 희랍철학 사상들을 혼합한 영지(gnosis)를 숭상하는 분파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을 부인하며 200여 년 동안 초대교회를 혼란시켰다.. 이들 영지주의적 사고를 담은 책들이 뉴에이지와 접목되면서 나온 책들이 다음과 같다. 「「성서 밖의 예수」 「불제자였던 예수」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성서 속의 붓다」 「석가와 예수의 대화」 「도마 복음서에 나타난 불교사상」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불타 와 그리스도」등 이른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과 일치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주장한 근거들을 볼 수 있다. 이들 영지주의적 서적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서적들의 공통점은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그 영감성이 부정되어 버림으로써 신뢰할 수 없는 역사적 문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과 더불어 예수는 그 신성이 제거되어 버린 채 하나의 인간으로서 뛰어난 불제자에 불과했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결국 진리의 근원은 붓다로부터 연유된다는 귀결에 이른다.
결국 구원은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는 뉴 에이저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B. 기독교 문화의 개발
오늘날 우리 주위의 수 없이 많은 문화들과 영화 그리고 음악들 속에 침투된 뉴 에이지 문화가 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경적인 가치관 속에서 진리를 잘 나타내는 문화적 요소들이 개발되고 영향력을 점점 빠르게 미쳐 나가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뉴 에이지 문화의 뿌리는 동양종교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비적인 동양 사상들이 서구에 유입된 다음 서구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밀려든 서구 문화도 제대로 체질화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는 구성원들에 의해서 가장 깊이 공유된 기본적인 믿음과 가치에 의해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기독교 문화의 개발이라 할 때에 단순히 인간의 습성이나 서구의 옷을 입자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곳곳에서 ‘미국인은 물러 가라’라고 외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는데 에서부터 라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 문화의 본질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 있다. 그리고 복음은 인간 문화의 옷을 입고 있지만 인간 문화로부터는 분리되어야 한다. 분리된 상태에서 복음이 문화 속에 들어갈 때에 항상 갈등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갈등의 요소가 심하게 나타날 때에는 선교사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모든 문화가 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들의 사는 방식을 보여주며,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문화를 판단케 하는 예언적 기능을 담당케 된다. 기독교 문화의 개발이란 이와 같은 복음의 본질이 인간 세상에서 바벨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문제는 기독교 문화의 형식만 담고 있다고 하여 기독교 문화의 개발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오히려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잘 인식시킬 수 있는 문화 창출의 작업이 시급하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청소년들은 교회 밖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미아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C. 창조 신앙의 회복
진화론은 뉴 에이지 운동의 세계관에 기초가 될 뿐만이 아니라, 뉴 에이지 운동을 과학적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기초가 된다. 진화론을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진화론이 과학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 중시되면서부터 과학 만능 주의로 모든 것이 흘러가 버렸다. 이와 같은 과학 만능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과 현대 과학이 상충될 때에는 언제나 과학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타락에 관한 이야기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조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창조적 신앙을 회복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질서가 파괴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회복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성화의 은혜가 나타나서 영적 폭발과 같은 창조적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하여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 창조과학회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론적인 입장에서 성경의 권위를 살려 나가는 운동들은 참으로 귀한 사역이라고 여겨진다.
D. 복음의 올바른 이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주 되심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뉴 에이지 운동 속에 나타난 사탄의 표적은 항상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을 분명히 대비시켜서 인간은 신(神)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뉴 에이 져들은 인간이 초능력적인 삶을 통해서 든 지,, 자기 자신의 신앙관에 의해서 하나님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창설자 에디(Mary Baker Eddy)가 쓴 「과학과 건강」을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책으로 신봉한다.
“에디는 모든 질병과 사망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인간이 아픈 것은 아프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아픈 것이고, 인간이 죽는 것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프 거나 죽는다는 ‘그릇된 생각’들은 최면술과 심리요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디는 모든 죄와 사망과 질병뿐만이 아니라 창조와 물질을 부정하고, 인간은 본래 선한 것이고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한 다.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 영이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뉴 에이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주의 말이나 교리가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믿는 죄를 범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창조되었지만(창 1:27-28), 아담의 범죄에 의해서 타락되어 죄가 인간 속에 들어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청하 인간들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느니라(행 4:12)”라고 성경은 복음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결국 뉴 에이 지적인 혼합주의 속에는 결코 구원의 진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E. 복음의 능력
복음은 곧 능력이다. 능력을 신유적으로만 해석하는 잘못된 신앙관이 많이 있다. 진정한 능력은 삶을 나눔을 통해서 얻어지는 능력이다. 한국 교회 속에서 이신칭의의 신앙의 공과를 부디 나눈다면, 교리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부분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구원 이후의 삶이 없는 것도 크나큰 모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 께서 하신 말씀 앞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느니라(마 7:21)’라고 말씀을 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우리의 신앙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공허한 메아리만 울릴 때에 뉴 에이지 운동의 인본주의 깃발 앞에 무릎을 꾾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결 론
지금까지 필자는 뉴 에이지 운동의 일반적인 면을 살펴보았다.. 뉴 에이지 운동은 일종의 상황(Contextualization) 가운데(Contextualization) 일어난 사조이며 혼합주의적인 세계관의 한줄기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조는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자기모순 속에서 돌출되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이면에는 그동안 합리주의와 이성주의 과학주의에 의해서 도외시되어왔던 동양의 신비적인 종교들이 진공상태의 서구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뉴 에이지 운동을 정리하면, 뉴 에이지로 옷 입고 있는 그들의 표적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다. 또한 인간이란 자기 능력을 확대 하며 로써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도 영생할 수 있으며 이 땅에는 사랑과 평화를 영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뉴 에이 져들의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가 가진 복음 위에 분명히 서 있어야 한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밀려오는 세속주의에 대한 하여 피흪리기 까지 싸워 이기는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교회는 이제 물량주의와 귀족주의, 그리고 세습 주의적 모순에서 벗어나서 개개인의 영육 속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신상언 씨가 우려한 데로 반 기독교적인 문화들이 뉴 에이지라는 옷을 입고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우리는 분명한 대책이 필요하고, 저들의 허구성을 신학적 입장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문화대 복음은 대립관계가 아닌 정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998년 아신대 박사과정 제출 소논문, 조귀삼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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