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8. 10:44ㆍ선교칼럼
구심력 선교(Centripetal Missions)로서의 한국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한국은 이제 세계의 기독교사에 있어서 참으로 비중이 큰 영역의 선교를 담당하는 국가가 되었다. 왜냐 하면 18세기 후반의 선교 수입국에서 어느덧 세계 제 2의 선교 수출국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 이제는 선교 신학과 선교 전략 속에서 구심력적 요소를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 적어도 선교에 이ㅛ어서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한국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은 구약속에 내재되어 있는 구심력 선교와 한국 교회와의 관계를 기슬하고자 한다.
우리가 선교를 논할 때에 구약에도 선교가 있느냐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부디 친다. 이는 곧 선교의 정의(definition of missions)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수반된다. 필자가 이해한 선교는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여 만민을 제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 의해서 선교를 해석할 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요나 선지자를 제외 하고는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는 선교가 없다는 이론을 가진 학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화란의 선교신학자 블라우(Blauw)나 독일의 신학자 겐시헨(Gensichen), 그리고 한(F.Hahn) 같은 신학자들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교 명령이 없다고 말한다. 즉 선교는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나타난 것 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주장은 구약 속에 나타나 있는 선교의 보편주의 사상(Universalism) 때문이다. 보편주의 사상은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들 속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면 기독교의 선교는 필요가 없게 된다. 다른 한편 구약에서 부터의 선교적 시원(始原)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의 선교는 종교진화론적인 입장에서 구약의 선교를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사상이 처음에는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을 거쳐서 보편주의화 하였고, 이러한 사상이 결국에는 선교에로 연결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은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선교를 말하고 있다. 조지 피터스는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로 구원을 계획하셨다"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는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구약 학자인 월터 카이저는 “구약의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오실 메시아를 아는 구원지식(saving knowledge)을 갖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순드클러(Bankt Sundkler)는 구약의 선교를 “구심력적 선교(Centripetal)”로 보았고 신약의 선교를 “원심력적 선교(Centrifugal)”로 보았다. 구심력적 방법의 선교는 강력한 자석처럼 열방을 자신에게로 끌어드리는 것이다. 선택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였고 충만한 복을 경험하게 하였다. 이러한 것이 열방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게 만들어 예루살렘으로 나아와서 여호와를 알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예를 솔로몬의 지혜를 받기위해 시바여왕과 진리를 찾아 왔던 에티오피아 내시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을 뒤 바침 하듯이 선교학자 리더(Richard R. De Ridder)는 “구약의 선교를 생각지 않고는 신약의 선교는 불가능 하다고 하면서, 선교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사실 구약의 선교는 신약의 선교처럼 유대 땅을 벗어나 원심력적 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하여 로마가 지배한 땅을 복음화한 선교는 아니었다. 구약의 선교는 신약처럼 선교의 행동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내재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전 인류를 대상이었다. 다만 이와 같은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백성이라고 호칭되는 이스라엘을 불러서 선교의 도구로 삼은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중에는 요나의 예를 들면서 구약에서의 구심력선교를 부인한다. 즉 요나서 에서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를 외침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욘 3:1-10)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요나 선지자의 이러한 외침도 자의(自意)적인 선교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마지못해서 니느웨 성으로 가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욘 1:2-3). 따라서 구심력의 선교의 틀을 헐 수는 없을 뿐만이 아니라 원심력의 선교를 위한 예시(豫示)라고 보아야 한다.
최근 우리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서 세계로 부터 주목을 받는 구심력 국가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진단 키트는 세계 200여국에 수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위상은 한국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도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구심력적 선교는 대하를 이루는 첫 단계인 작은 샘물의 시원이 되어 인류를 위한 섬김과 나눔 그리고 겸손하고 온화한 마음을 나누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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