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5. 11:49ㆍ선교칼럼
신실한 관계 형성의 선교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지난 호에서는“신실한 삶을 통한 선교”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신실한 관계 형성이 어떻게 선교가 되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신실한 삶의 현존을 통해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게 되어 있다. 이 때 복음을 직접 입으로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관계 형성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 형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을 통해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리가 타자를 ‘그것’이라는 사물로 대할 때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타자를 ‘너’로 대할 때 상대의 말에 경청하며 상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관계 전도는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을 넓히기에 다른 종교에 대해 무지하거나 문서를 통해 편협하게 알던 타 종교를 그리스도인들이 실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조지 헌터는 복음 선포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로마식 전도와 교제를 통해 마음을 열고 대화로 믿음과 헌신까지 인도하는 켈트 전도법을 비교한다. 켈트 전도법과 같은 관계 전도는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 더더욱 절실하다. 한국 교회는 현재 한국 사회로부터 심한 질타와 멸시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도지를 거부하는 것은 예사고 노방전도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적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비신자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미 관계전도를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단체에서는 저녁 식사에 비신자들을 초대하여 거나하게 상을 차려서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이 식사에서 오는 마음의 오픈을 전도에 연결로 연결시키는데 일정 효과가 있다. 그러나 최고의 관계형성은 아무래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이 한잔 걸치면서 나누는 관계성이 한국의 전통 친화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잔을 함께 기울일 수는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한걸음 더 나아가 타 종교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더욱 깊게 나타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과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으로 될까 두려워서이다. 이러한 마음은 일부분 일리 있는 이론이다. 관계성은 함께 함을 통해서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상이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수용과 용납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드웨인 엘머(Elmer Duane)는 수용과 용납의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한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좀처럼 수용과 용납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한다. 대표적인 예가 집단주의 문화의 국회에서 정당끼리의 논쟁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논박할 때 인심공격은 예사고 논쟁이 끝나면 상대 당의 사람을 적으로 여긴다. 이런 모습은 이슈와 개인을 구분하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좀처럼 살펴볼 수 없는 예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주장을 반대해도 그 사람을 수용한다. 하지만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의견과 그 사람을 다르게 보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을 수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리스도의 삶은 이런 혼합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을 나누셨다. 그런 그의 모습은 종교적 위선자였던 바리새인들의 비난 거리였다(마9: 11; 막 2: 16; 눅5: 30). 만약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던 것이 혼합되는 것이고 영적으로 섞이는 것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육 신하실 때부터 이미 깨어진 세상에 함께 삶을 나누시는 것을 복음 전파의 방법으로 삼으셨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복음 전파를 위한 과정이 되는 이유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다. 비록 한국이 근대화를 통해 많이 개인주의화되었지만,, 아직도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이 남아 있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계를 통해 먼저 같은 집단의 일원이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자신의 아파트 문을 개방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길어야 하겠다.
2016년 7월 10일 “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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