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1. 15:49ㆍ선교칼럼
남아프리카 선교회 창설자인 로버트 모펫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모펫(Moffat)은 179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성경교육도 효과적으로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영적인 일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는 17세가 되자 영국의 채서(Cheshire)로 가서 정원사로 취직을 하였다. 1814년 그가 일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의 작은 감리교회의 모임에서 신앙심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심의 사건이 있기 전에도 어머니의 기도와 선교에 대한 이야기는 모펫이 신앙을 얻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앙의 열정이 되살아나고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모펫은 런던선교회 회장인 윌리엄 로비(William Roby)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선교사역에 대한 마음이 궂혀지게 되었다. 해외 사역을 자원한 모펫의 기대와는 달리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파송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모펫은 선교사로 파송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로비 목사의 집 근처에 일자리를 얻어 살면서 로비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1년 후에 결실을 맺어서 런던 선교사 파송의 일원으로 추인이 되었다.
모펫은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른 신참 선교사 4명과 함께 85일의 항해를 마친 다음에 아프리카의 케이프 타운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모펫의 결혼은 한때 자신이 정원사로 일했던 주인집 딸인 메리 스미스(Mary Smith)와 아프리카 도착 이후 3년 만인 1819년에 실현 되었다. 아프리카 땅은 선교사들에게 개척의 땅이기도 하지만 선교사 상호 간에 불신과 불화의 땅이기도 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이 정치와 기업들과 결탁하여 실시하고 있는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심한 자괴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모펫의 선교전략은 아프리카 부족을 이끌고 있는 추장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어서 호텐토트족의 추장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에 찾아낸 땅인 쿠루만을 선교의 기지로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그곳 기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쿠루만 지역에 살고 있었던 베쿠아나 족의 사역을 통하여 1823년에는 상당한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함에도 모펫의 사역이 활발하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모펫이나 복음의 수용자들인 베쿠아나족이나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두 번째는 모펫이 현지 언어를 잘 알지 못함에서 오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조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선교의 부진을 해소하기 위해서 모펫은 부단히 노력하였다. 가장 먼저 서둘렀던 전략은 언어극복 이었다. 따라서 1827년에는 부인인 메리와 자녀들을 떠나서 숲 속에 있는 원주민들에게로 직접 가서 언어를 배웠다. 언어를 배우게 되지 모펫의 선교는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모펫은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누가복음부터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29년이 지나서야 번역을 완수할 수 있었지만 오류가 너무 많아서 인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성경번역의 다음 단계는 출판 이었다. 1830년에 번역된 원고를 가지고 케이프 타운에 갔지만, 열등한 원주민의 언어로 성경을 출판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모펫은 결국 인쇄기를 빌려서 출판을 하게 되었다.
성경의 번역과 출판은 모펫의 사역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1836년 외딴곳에서 사역을 하던 모펫에게 젊은 사역자가 모펫이 번역한 누가복음을 인용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영광을 주님께 돌리기도 하였다. 모펫의 사역은 아프리카에서 사역이 길어질수록 빛을 보게 되었다. 40여 명의 학생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였다. 현지 언어로 복음을 증거 하자 교회는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가 쿠루만에 도착한 지10년 만인 1829년에는 첫 번째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1838년에는 현재까지 버티고 서 있는 교회당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모펫의 사역은 쿠루만을 벗어나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교인들은 200여명을 넘지 않았지만 인근 부족들까지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선교 철학 가운데 “성경과 경작”이라는 요소가 실천으로 옮겨져서 인공 수로를 통하여 500 에이커의 땅을 경작하게 만들었다. 모펫의 가족은 부인을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7명이었다. 이들 자녀 가운데 영국 선교의 전설적인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사위로 두기도 하였다. 모펫은 50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후 13년을 더 살면서 아프리카 영혼들을 위한 선교의 도전을 펼친 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010년 5월 26일 “교회와 연합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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