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1. 15:42ㆍ선교칼럼
아도니람 저스든 부부의 미얀마 사랑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아도니람 저스든(Adoniram Judson) 그의 부인 낸시(Nancy Judson)는 1812년 인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을 현대 미국 선교를 열었던 인물로 평가한다. 아도 니람 저스든 은1788년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 목사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천재적인 머리는 16세에 브라운 대학교(Browen University)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3년 만에 4년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아도니람은 친구인 제이콥 임즈(Jacob Eames)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임즈는 학창시절의 친구였으며 보수적인 신앙을 부인한 자연 신론을 추종하는 자였다. 한 때에 임즈의 사상에 동조했던 아도니람은 집을 떠나서 세상의 풍조에 빠져 허우적거린 어느 날 그가 투숙하였던 여관방에서 신음하며 쓰러진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에 자신의 영혼 문제에 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도니람은 아버지의 권유로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곳에서 미국의 선교 역사에 획을 그었던 “건초더미 기도회” 멤버였던 사무엘 밀즈(Samuel Mills)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앤도버 신학교의 학생은 비록 소수의 무리였지만 미국 선교회(American Board) 탄생의 촉진제 역할을 감당하였다.
아도니람은 낸시라고 알려진 앤 하셀 타인과 교제 후에 1812년 2월에 결혼을 하였고 13일후에는 인도를 향에서 선교 부부로 떠나게 되었고 6월 중순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인도는 그들의 사역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미얀마의 랭군으로 향하게 되었다. 인도와는 달리 그 당시에 미얀마는 유럽인의 마을도, 카스트 제도도 없었다. 미국을 떠난지 2년 만에 랭군에 커다란 집을 장만하여 침례교의 선교캠프를 만들고 하루 12시간을 활해하여 미얀마의 언어를 습득하려고 애썼다..
미얀마의 선교적 토양은 척박하기 이를 때 없었다. 기독교가 성장만 하면 정부에서 단호한 제재조치를 감행하였다. 그런 상황 가운데에도 아도니람은 정치적 상황의 반전을 통한 당국의 호의를 받게 되면 활발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도니람 저스든 부부의 선교전략 가운데 첫 번째 요소는 자야트의 할 용이다.. 쟈야트란 한국의 초대형 온두막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좋은 장소이면서, 찾아온 그들을 통해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전략은 선교에 효과적인 방향으로 전게 되었다. 선교 센타에는 발길을 들여놓지 않으려던 사람들도 쟈 야트에는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1819년 5월 자야트를 만들어서 선교사역을 한지 한 달 후에 마웅 나야 라는 미얀마 현지인 결신자가 생겼다. 1820년 여름에는 10여명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두 번째는 성경의 미얀마 언어에로의 번역이었다. 1823년경에 1년여 가까이 노력한 결과 신약성경을 선교지 언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1824년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미얀마와 영국이 전쟁을 하였다. 서구 사람인 아도니람은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치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은 인간이 생활하기에 참으로 열악하였다. 선교사들도 족쇄에 채워서 일반 죄수들과 함께 어둡고 더러우며 벌레가 들끓는 곳에서 지내야 하였다. 1825년 11월 1일 1년 반만의 억류 끝에 아도니람은 영국과 미얀마 간의 휴전협정 통역을 하기 위해서 풀려났다. 그리고 사모였던 낸시 와의 13년 결혼생활의 짧은 행복도 마감하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갖은 고통을 감내하던 낸시는 하나님의 부름으로 아도니람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아도니람은 사라 보어드맨과 재혼하여 10년 동안 8명의 아이를 낳아서 대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1845년 보어드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46년 6월 포레스터(Fanny Forrester)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던 에밀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저스든의 사역 뒷면에는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이 겪어야 했던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을 주시어 두 명의 목사, 한명의 의사, 교장이 된 딸 등으로 헌신하는 결실을 얻었다. 1850년 봄 아도니람 저스든 은 눈을 감았다.
필자의 오랜 동역자 가운데 카이라는 형제가 있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신의 땅에 돌아가 기독학교를 창설하여 운영하고 있는 친구이다. 필자와의 대화 가운데 자신의 고향지역에 아도니람 저스든 이 사역하였고 선교의 결과로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비록 저스든의 사역은 끝났지만 미얀마 선교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2010년 5월 16일 “교회와 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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