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과 백인의 선교사 묘지

2020. 3. 31. 15:46선교칼럼

검은 대륙과 백인의 선교사 묘지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아프리카 대륙의 개신교 선교는 18세기에 모라비안들이 케리프 식민지에서부터 처음 시도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세 지역으로 선교기지가 확산되었다.. 즉 서쪽은 시에라 리온(Sierra Leone), 동쪽은 이디 오피 와와 케냐 그리고 남쪽은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이었다.

  아프리카 선교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검은 땅에 백인 선교사들의 묘지이다. 이는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사역하다가 죽고, 죽어서 잠자는 묘지가 검은 대륙의 회심자들 보다 많다는 상징적인 용어이다. 사실 검은 대륙인 아프리카는 선교사들이 정착하여 복음을 심기가 쉽지 않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백인 선교사들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피를 흘리게 만든 아프리카는 많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던 땅이었다. 부족들 간에는 어쩌면 쓸데없는 전쟁으로 인해서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였고, 전통적인 악습인 헤드헌팅,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에 죽여 버리는 살인행위, 인간을 잡아서 제사를 지냈던 행위, 정령숭배를 통한 요술행위 등이 그치지 않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야만적인 삶은 복음의 선교사들을 그토록 무참히 살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그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아프리카 선교를 언급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의 잘못을 목청 높여서 지적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는 제국주의자들과의 야합을 들고 있다.

  제국주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외교관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제국주의, 상인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제국주의 그리고 선교사로 대표되는 문화적 제국주의이다. 사실 토착민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이 같은 세 가지 종류들을 각각 구분하기는 힘든 작업이었다. 아프리카 선교 초기만 하더라도 선교사들은 원주민들과 다양한 무역 활동을 하였다. 경제활동을 통해서 선교사의 집에 피신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보호자로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현지인의 눈에 비친 선교사는 자신의 땅을 지배하는 사람들로 비쳐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둘째는 아프리카의 전통문화의 파괴를 말한다. 전통문화의 파괴는 문화 변혁이 몰고 온 당연한 결과였다. 선교사들의 눈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개하고, 과학화되어 있지 못함에서 오는 열등한 문화를 고쳐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아프리카 에서는 상업, 문명화 그리고 기독교는 같은 용어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문명화의 작업은 숨겨진 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숨겨진 문화는 교회생활을 통한 문화적 생활과 집에 돌아가서 행동하는 전통적인 생활 패턴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선교 동향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볼 때에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의 일부분이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선교사들의 순교적 헌신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은 당시의 서구가 갖고 있었던 문화적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피부색이 검더라도 선교지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상은 당시 서구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흑인에 대한 생각들을 정면으로 반박한 행동이었다. 서구 사람들은 흑인들을 열등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며, 서구인들과 똑 같은 영혼을 갖지 않는 하등 족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선교의 부정적인 부분을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의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만들어 교육에 힘썼고, 병원을 만들어 의료 혜택을 보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를 건축하여 영혼의 안식과 함께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역을 하였다. 이러한 사역을 진행하다가 순교하면 그 땅에 영원히 안식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검은 피부색의 영혼들이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온 숫자보다도 백인 선교사의 무덤이 많았다는 표현으로 아프리카 초기 선교를 이야기한다..

2010523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