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1. 15:53ㆍ선교칼럼
선교를 통해서 얻은 삶의 만족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디모데 전서 6장 7절에서부터 10절에 보면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 에게 써 보낸 편지가 성경이 되어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주고 있다. 디모데는 제2 차 전도여행 가운데 만나서 에베소 교회의 개척과 함께 3여 년 동안 함께 사역을 하였던 영적 자식이다. 서신서의 성격상 개인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것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모든 교역자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봐야 한다. 본문은 목회자의 경건한 삶이 중요함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인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자세, 직무, 목회의 원리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몇 년전에 있었던 영국의 황실에서 일어났던 챨스 황태자와 그의 부인인 다이에나에 관한 일이다. 그들의 결혼식은 세계의 모든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 지친 다이에나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란 당연히 한 번 오는 것입니다만, 그녀의 결혼식 때 가졌던 품위와 영광에 비하면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었다. 한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몇 가지를 살펴볼 때에 인간 속에 참된 만족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질문 속에 우리는 세 가지로 답할 수 있다.
첫째는 참된 만족은 그리스도를 소유함에 있다. 인간은 때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의 기준이 되고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행복과 참된 만족은 꼭 소유에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구약에 보면 욥이라는 부자였다.. 그는 자녀와,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동방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자다. 그러나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물을 날려 버렸다. 소유가 인간 삶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 했다면, 욥은 당연히 자살을 하여야 할 사람인데도 그는 욥기 1:21에 고백하기를 “주시는 자도 여호와 이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 시니...”라는 고백을 통해서 참된 삶의 가치를 꼭 소유에다 두고 있는 것은 아님을 고백하고 있다.
욥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누가복음 12:13-21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자는 곡식이 많아서 쌓아둘 곳이 없을 만큼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부자는 심중에 생각하기를 이제는 평안이 쉬자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은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어리석은 삶을 책망하는 비유를 보게 된다.
두 번째는 참된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함에 있다 물질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매우 유익하다. 따라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우리 성도라고 하여서 삶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물질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물질들이 있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 만약 물질 지상주의의 삶을 산다면 그 인생은 파멸로 몰아가게 된다. 무소유(삼야신)무소유(삼 야신) 사상을 가진 법정 스님이 얼마 전에 죽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삶의 청빈한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하였다. 타종교의 삶도 청빈과 무소유를 강조하건대 하물며 크리스천 이랴? 성경은 히브리서 13:5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빌 4:10-13에는 “자족하는 삶”을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할 줄 믿는다.
셋째는 참된 만족은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데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세상적인 욕심이 어떤 삶의 결과가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사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돈은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되며,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되며, 그리고 많은 근심을 오히려 가져오게 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 전서 6:17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이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인 경제관을 통해서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하겠다.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의 선교”를 감당한 세기였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교”란 필요한 선교비를 하나님께 직접 구해서 사역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 그리고 수많은 개신교의 초대 선교사들이 돈을 이겼기 때문에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만들 수 있었다.
2010년 6월 6일 “교회와 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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