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 13:02ㆍ선교학 강의
한국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전략 연구
조귀삼 교수 (한세대 선교학)
들어가는 말
한국 CCC의 역사적인 “민족복음화 운동”의 선언은 1971년 0시를 기해서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선포하였다. 민족복음화 운동의 상징적인 구호인 “민족의 가슴마다 피 뭍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라는!” 구호는 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 CCC의 시작은 김준곤 목사와 국제 CCC 총재인 브라잇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 CCC는 국제 CCC의 최초 해외 지국이 되었다. 1958년 김준곤 목사에 의해서 학원복음화를 목적으로 시작된 한국 CCC는 초장기의 학원사역의 틀을 벗고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CCC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해서 “나사렛형제들”“나사렛 형제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들을 통해서 민족복음화 요원들을 훈련시켜서 한국 전체에 소제한 52,000여 개의 자연부락의 네트워킹을 위해서 도, 군, 면, 동 단위의 지도자를 임명하여 직임을 주는 전략을 가졌다. 특히 민족복음화를 위한 복음의 특공대처럼 편성된 나사렛 형제들은 삼중 헌신과 사대 행동강령을 가지고 실행하였다. 즉 삼중헌신은 “주님에의 헌신, 민족복음화에의 헌신, 형제들에의 헌신”이었다 그리고 사대 강령은 “절대 헌신, 절대 순종, 절대 훈련, 절대 행동”이다. 삼중헌신과 사대 강령을 뒷받침할 이론적 토대는 독특한 구조의 “순론”이다.
한국 CCC는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 가운데 Explo 74 대성회와 같은 대형 집회와 일년에 두 번씩 모이는 수련회 그리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진행된 수많은 성시화 집회들을 통해서 얻어진 자원들을 민족복음화에 동기를 부여했고, 요원들을 훈련시켰으며, 모든 자원을 결집시켰다.
역사학자인 박용규는 “초교파 선교단체가 미국복음주의 운동의 발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선교단체는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발흥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 CCC의 역할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세계선교의 산파역을 1970년대 대중운동을 통해서 감당했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유입된 선교단체가 한국 속에서 착근하는 동안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한다는 등의 많은 오해들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박용규의 기술은 정당한 평가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이 글을 엮어 가는 동안에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한국 CCC는 1958년 창립 이래 학원복음화, 민족복음화, 그리고 세계복음화에 대해서 많은 활동들을 해왔다. 이 모든 활동들을 좁은 지면에 모든 것들을 다룬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임과 아울러 이번 논문 발표의 주제의 성격과도 차이가 있음을 밝혀둔다.
따라서 필자는 이 논고를 통해서 한국 CCC가 1970년대에 주창했던 “민족복음화 운동”의 전략들을 선교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봄과 아울러 한국교회와 남북한 가교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I. 한국CCC의 정체성
A. 기독교 학생 선교운동
대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학은 기독교의 바탕 위에서 세워졌으며, 최초의 유럽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세워진 볼로냐대학이었다. 볼로냐 대학은 법학 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의학이 생기고 1360년에는 신학부가 설립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기독대학생들은 복음의 부흥운동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작업들을 많이 하였다. 초대와 중세 교회의 수도원 중심으로 일어난 복음운동은 종교개혁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대학가에서 기독학생 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기독학생 운동의 시발지는 역사적으로 볼 때18세기의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부터 라고 볼 수 있다. 즉 영국의 홀리클럽(Holy Club)은 1729년에 챨스 웨슬리 (Charles Wesley,1707-1788)에 의해서 태동하였다. 그리고 형님인 죤 웨슬리는 홀리 클럽을 다방면에서 도왔다. 죤 웨슬리는 성화론의 새로운 지평과 함께 “감리교도”들을 하나로 묶어서 영국교회와 세계교회의 부흥운동에 중심인물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많은 회원들 가운데 조지 휘트필드의 1733년 9월 가입은 학생운동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 정준기는 엄격하게 훈련받은 홀리 클럽의 영향에 대해서 “성경적 성화 이론의 정립, 영적 지도자의 양성, 성경적인 사회참여 활동, 평신도 연합 학생운동을 드러내어 영적 각성운동을 이루었다”라고” 평가했다.
영국에는 홀리 클럽과 같은 영적인 선교단체가 있었다면, 미국에서는 일명 ‘건초더미 그룹’이 있었다. 사무엘 밀즈(Samuel G. Mills)를 중심으로 윌리암스 대학 속에서 모인 ‘형제단(Society of the Brethren)’은 세계선교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이후에 몇 명의 멤버들과 함께 엔도버 신학교(Andover Seminary)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선교 주제 연구회(Society of Inquiry on the Subject of Mission)'를 조직하여 더욱 활발하게 선교를 향한 결의를 다져 나갔다. 이들의 노력으로 1810년 6월 28일에 회중교회 목회자들을 움직여 해외선교회(Foreign Mission Board)를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교운동이 점점 증대되어 ‘자발적 학생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운동은 1880년대에 프린스던 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월더(Robert P. Wilder), 19세기 가장 위대한 전도자 무디(D.L.Moody), 당시에 코넬 대학의 학생이었던 죤 모트(John R. Mott)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폭제의 역할을 했던 수련회가 1886년 여름의 매사추세츠의 헐몬산(Mount Hermon) 수련회 였다. 무디는 이 집회에서 100명의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교사가 되겠습니다(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프린스턴 서약(the Princeton Pledge)과 함께 시작되었다. 1888년 이 운동은 뉴욕시에서 해외선교를 위한 자발적인 학생운동이라는 공식 기구로 발전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캠퍼스에서의 복음운동은 지역교회에게 영향을 주어 영적 재생산의 기회를 제공함과 아울러 국가 교회를 깨우는 역할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학생들의 신앙운동은 국내외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역동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B. 한국 CCC
한국 CCC는 국제 CCC의 지역 확장 정책과 함께 시작되었다. 국제 CCC는 빌 브라잇 박사에 의해서 1951년 미국에서 창설되었다. 그리고 김준곤 목사는 1958년 국제 CCC의 한국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국제 CCC의 사역 가운데 성공적인 국가 단위의 사역이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국 CCC와 국제 CCC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함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1). 국제 CCC
1951년에 국제 CCC를 창설한 빌 브라잇은 헨리에타 C. 미어즈 박사의 신앙운동에 깊은 도전을 받았다. 그가 대학생 선교운동에 소명을 받은 것은 풀러신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생 선교를 위한 비전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플러 신학교 졸업반이었던 해 어느 날 밤, 나는 자정이 가깝도록 헬라어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주위 환경은 평상시와 다른 것이 없었다. 아내인 보네트는 이미 옆방에서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어떤 예고나 징후도 없이 갑자기 나는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상태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다.. 몇 초 동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강이었지만 주님께서 나의 생활과 사역에 대한 지시를 내 마음의 스크린에 쭉 펼쳐 보이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러한 사건이 있는 후에 교수님이신 스미스 박사가 CCC (대학생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첫 사역을 당시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캠퍼스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에서 시작하였다. CCC의 사역이 미국에서 크게 활동할 수 있는 계기는 Explo 72 대회였다.대회였다. 이 대회는 1969년에 빌 브라잇에게 비전이 주어졌다. 1972년 텍사스 달라스에 개최되었을 때에 10만 명이 운집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는 Explo 74를 주관했고, 6년 후 ’80 복음화 대성회, ’ 84세계기도대성회, 특히 Explo 90을 통해서는 세계의 1,000여 도시에 동시에 복음을 선포하기도 했다. 평신도 사역으로는 “Here's Life Training Center”를 통해서 훈련시키고 있다. 지금 현재는 191개국에 지부를 세웠고 2만 66천 명의 전임 사역자가 사역을 하고 있다.
2). 한국 CCC의 창시자 김준곤
한국 CCC를 창립하여 활발하게 선교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김준곤 목사다. 그의 유년시절은 유난히 고난이 많았다. 청년기 일본의 압제 때에는 징병이 되기도 하였고, 피난 때에는 만주 국경에서 화전민들과 함께 초근목피의 생활도 하였고, 6․25 때에는 사모님을 잃기도 하였다.
김준곤에게 신앙을 심어준 사람은 문준경 전도사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복음을 받은 이후 신앙 성장과 함께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조선대학교 문학과에서 수학 하는 동안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안수와 함께 광주의 숭일중 고등학교에서 교목과 교장으로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풀러신학교에 유학을 하는 동안에 국제 CCC의 총재인 빌 브라잇과의 만남을 통해서 국제 CCC의 한국 지부 책임자로 발령을 받고 1958년 10월에 한국 CCC를 설립하게 되었다.
김준곤에게 있어서 ‘민족복음화’에 대한 비전은 만주의 피난시절에 접한 2000여 권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6․25 사변 때에는 가족들이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죽었으나 그는 죽음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최근 발행된 교계의 잡지에 인터뷰하면서“제가 일제시대를 이야기한 것은 주님께서 사선에서 저를 붙잡아 주셨고 그래서 한국의 민족복음화 운동이 평생의 키워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의 저서로는 설교집으로는『김준곤 문설 집』과』 조선일보에 연제 되었던 글들을 모은 『예수칼럼』『예수 칼럼』등 수많은 저서들이 있다. 그는 대형집회의 대회장을 역임했으며, CCC의 동아시아 대표를 지냈다.
김준곤 목사는 그리스도 유일성의 복음주의 신학을 가졌지만, 선교를 위해서는 죤 스토트(John Stoott)의 통전적 복음(Whole Gospel) 선교를 주창하고 있다.
3). 한국 CCC의 태동과 활동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 CCC는 1958년 김준근 목사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한국 CCC의 착근기에는 간사들과 함께 기도와 수련회를 통해서 사역을 확대해 나갔다. 최초 의대 학생 수련회는 1964년 7원 25일에서 6박76박 7일의 일정으로 경기도 입석 수양관에서 658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수양회가 끝날 무렵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을 영접하였고 감사와 찬송으로 감격해하였다.. 이 해의 놀라운 결실을 통하여 한국 CCC의 전도운동이 폭발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을 더 깊이 더 뜨겁게 가슴에 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일로 영광을 받으셨고 계속해서 이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생생하게 심어가셨다. 그 다음해인 1965년은 각 지구 별로 혹은 도 별로 분산 개최되었다. 1967년 수련회는 7월 31일부터 8월 5일까지 5박 6일 동안 “어둠에서 빛을 발하라!”라는 주제로 전국에서 온대 학생3백 명이 모였다. 이 대회의 특징은 수련회를 마치고 복음과 함께 의료봉사, 농촌봉사 등 봉사활동에도 주력을 하게 되었다. 1968년은 지구 별 혹은 지방 별로 분산 개최되었다. 이러한 신앙 수련회를 통해서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 운동을 위한 기반 조성을 했다.
II. 한국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
한국 CCC의 태동기에는 사역의 중점이 전도와 아울러 회원들의 신앙 증진의 훈련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 CCC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준곤 목사의 메시지를 통해서 사역의 중심이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넓혀져 가게 된다. 김준곤 목사는 1971년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민족복음화 운동을 일으키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한국의 예수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내버리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300명만 있으며 한국은 반드시 기독 화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기어이 우리 세대가 가기 전에 한국 민족을 기독화 시켜야 합니다. 반드시 기독화 된다고 믿고 기독화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 이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통해서 민족복음화에의 동기를 유발하였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성화되고, 사람들이 복음화되고,, 언어가 복음화되고,, 가정이 복음화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는, 머리털부터 발바닥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민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 운동의 열정은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예수님도 자신의 동족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고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함에도 육신을 입고 초림 하신 유대 땅 백성들의 미래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지시고 예루살렘의 멸망(눅 23:28)을 예견하셨다. 또한 바울의 견해를 살펴보자. 바울의 자민족 이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언약 백성이므로 민족의 구원을 강하게 열망하고 있다.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라고 민족구원을 열망하였다.
한국 CCC는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서 모든 국민들이 예수님의 복된 소식을 듣게 하는 것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모든 한국인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에수님에 대해서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은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전략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A. 설득 전도 전략
한국 CCC는 개인전도에 대해서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개인 전도를 통해서 전도훈련과 제자화의 네 가지 주요 프로그램에 연결시킨다. 이는 LTC(Lerdership Training Class), LTI (Leadership Trainng Institute), GCTC(Great Commission Training Center), 그리고 NLTC(New Life Training Center)이다.
마이클 그린은 초대교회의 성경적 전도에 대해서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evaggelizesthai(좋은 소식을 전한다), Kerussein(선포하다), Maturein(증거하다)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전도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돌이켜 그의 교회로 가입시킬 목적으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마이클 그린의 정의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서 현대 전도를 세 가지 점에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존재(presence), 선포(proclamation), 설득(persuasion) 전도이다.
물론 한국 CCC는 상황에 따라서 와그너가 말한 세 가지 모두의 전도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역시 중심이 되는 것은 요원들을 훈련시켜서 현장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설득전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1). 설득전도의 재료들
가장 먼저 한국 CCC가 사용한 전도지는 “사영리”라는 소책자이다. 사영리는 네 가지 영적 원리를 효과적인 전도방법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네 가지 영적 원리란,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죄, 유일한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기술해 놓고 있다. 사영리 소책자는 간단명료하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어서 효과적인 전도 자료이다. 사영리의 효용성에 대해서
첫째,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대화의 문을 열어주는 간단한 말로 시작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람 하십니다”라는” 긍정적인 언어로 대화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셋째,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는가에 대한 방법이 나와 있다. 넷째, 예수님 앞으로 초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섯째, 교회를 통한 신앙 성장을 제안하고 있다. 여섯째, 전도의 방법과 활용에 대해서 확신을 주고 있다. 일곱째, 짧은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하여 영접토록 하게 만든다. 여덟 번째,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전달 가능한 소책자이다.
CCC의 전도전략은 복음 증거에 있어서 단순한 전달방법의 증거이다. 이는 전달자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증거 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즉 성공적인 전도 방법은 성령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방법이다. 성령님께 의존함이란 “지속적인 영혼의 호흡”을 통해서 이다. 이는 인간이 숨을 쉬듯이 숨을 내어 쉴 때는 죄를 고백하고, 숨을 들이쉴 때는 성령님을 모셔드리는 것이다.
CCC의 전도 훈련은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훈련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전도의 기본적인 훈련을 논리적 변증 방법 대신에 반복하고, 또 반복함으로써 숙련되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활용하는 전도지는 사영리, 육성만남, 그리고 제자화 교육 훈련교재이다.
2). 순례전도
순례전도는 한국 CCCCCC 학생들의 신앙 훈련의 한 과정이 되어 수련회 후에 참석자 대부분은 거룩한 거지가 되어 개인 전도를 떠나게 된다.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을 시키면서 “순례전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거룩한 거지론”에서 말하기를 “희랍의 최대 행자 디오게네스는 거지였다. 석가도 거지였고, 프란시스도 거지였다. 주님도 머리 둘 곳이 없을 만큼 가난한 거지였다.” 따라서 “가난하고 고달픈 형제를 끌어안고 울며 주의 복음을 전하는 20세기 후반부의 최대 거지 전도단을 파송하고 싶다”라고 주장하였다.
한국 CCC의 순례 전도단이 갖는 의미는 눈높이를 낮추어 어느 상황 속에서도 적응하려는 선교정신이다. 비록 사회의 지성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한 끼의 밥을 구걸하면서 낮아짐의 전도는 가난한 자들과의 합일을 위한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데이비드 보쉬는 성경 속에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선교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누가는 많은 부분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가 고난당하는 모든 자들의 명단을 제공할 때에 그가 가난한 자를 그 명단의 머리(4:18, 6:20, 14:13, 14:21)에 두거나 또는 절정으로서 그 명단의 끝(7:22)에 두는 방식이다. 불행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들이다. 이것은 특히 병든 자들에게 해당된다. 누가복음의 모범적 안 가난한지는 나사로이다. 그는 병들고 가난했다. 빈곤이 분명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복음에서 빈곤은 주로 사회적인 범주이다.”
순례전도를 마친 건국대 건축학과를 다녔던 박주한 학생의 “거룩한 거지의 할렐루야!”를 간증을 들어보자.
“... 열다섯 명의 거지들은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에 도착하였다. 둘씩 짝을 지어 각각 둔산리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어떤 아저씨가 나오셨다. 우리는 즉시 사영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전했다. 그러나 젊은 부부는 영접하지 않았다. 돌아서 나오다가 건너 방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에게 복음을 증거 하자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도문을 한 구절씩 따라 하셨다. 나는 너무도 기뻤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여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출석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전도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설득전도나, 순례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현장에나 사영리는 효과적인 전도지였다.
B. 훈련을 통한 육성 전략
한국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의 과정에서 전도요원 훈련의 전략을 사용하였다. 먼저는 민족복음화 요원들을 면단위 별로 확보하고, 소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 면단위의 요원 밑에 3,4명 정도의 보조자가 마을을 책임짐과 아울러 3개월 이내에 동 단위의 책임자를 만든다. 각 동 단위별로는 2명 정도가 먼저 시작하여 12명 단위의 순을 만들어 대학생선교회 발행의 교재를 사용하여 사랑방 속에서 성서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은 결코 단회적인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사랑방성서학교운동”“사랑방 성서 학교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 운동은 복음의 터를 닦는 운동, 혹은 복음전도의 예비작업(Pre evangelism)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교회 이전에 복음의 씨를 심는 씨알 심기 운동(Pre Church)이다. 이 운동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가‘사랑방 성서 학교 운동“교재였다. 한국 CCC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초창기에 요원으로 참여하여 훈련받은 사람들에게는 숙식비 일체를 제공하였다.
한국 CCC가 사랑방 선서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은 “사랑방‘이라는 민족 고유의 사랑방을 성서 학교로 만들자는 아이디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훈련된 요원들이 59,000여 자연부락에 십자군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를 열망했다. 즉 공산당의 선전원, 창가학회, 신흥종교의 포교원보다도 더 많이 힘쓰는 전도꾼을 주창했다. 사랑방 운동은 그 목표에서 “민족 복음화 운동은,, 첫째로 개인의 심령이 변화를 받게 하는 일을 본질적 사명으로 삼으며 나아가서 민족 생활과 역사 전폭을 기독화 시키고자 하는 긍극적인 목표를 추구하였다.”
이 운동은 1973년에 전국에서 모인 14,000여명에게 1차적인 훈련을 실시하였다. 한국 CCC의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운동이 연속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는 것이다. 김준곤 목사는 ““사랑방 성서 학교 운동은 비정치적이며, 자비량 선교 방법인 네비우스 선교의 정책을 따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민족복음화 운동 초창기의 한국 CCC의 대형 집회는 모두 민족복음화 요원들을 훈련시키는 집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규모의 한국 CCC의 여름수련회, 1971년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민족복음화를 위한 전도훈련, 1972년 춘친성시화대회,, 사랑방 성서 학교 요원 훈련, Explo '74, '80 세계복음화 대성회를 통한 전도훈련이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개인전도뿐 아니라 연합전선의 총력전도, 협력전도를 벌였다.
CCC의 훈련은 ‘‘전달 가능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증거가 한 사람이 아닌 다중 전도자에 의해서 지상명령 성취를 앞당길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다른 말로 적극 전도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적극전도법적극 전도법(aggressive evangelism)은 Explo '74를 통해서 제자화 훈련을 통해서 실증되었다. Plowman은 말하기를 30만 명의 등록자는 당시 한국 그리스도인의 10%이다. 이 훈련생을 통하여 성도들의 효과적인 믿음 생활과.. 제자화, 그리고 개인전도 훈련을 시킬 수 있다” “12,000여 교회의 10,000여 명의 목회자 가운데 6,000명이 참석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훈련은 즉각적인 반응과 함께 자신의 가족과 이웃, 사회 관계자, 그리고 마을을 다니며 증거 하는 훈련이었다.
C. 대형 집회를 통한 전략
한국 CCC의 민족복음화 운동은 대형 집회들을 통해서 동기부여와 함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는 전략을 가졌다. 대형 집회라 함은 Explo 74 같은 대규모 동원의 집회를 포함해서 각 지역의 거점도시 별로 개최되었던 성시화 운동 그리고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매년 두 차례의 방학과 함께 시작된 신앙수련회를 표함 한다.
최초의 대형집회는 1971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전국에서 모인 12,000명의 청․장년, 대학생, 일반성도들, 교회의 목회자를 포함한 지도급 인사들을 참가시킨 가운데 대규모의 전도요원 훈련(Leadership Training Instirute) 집회를 실시하였다. 이 집회에 참가한 목사 및 전도사는 426명이며, 훈련받은 총 수는 10,653명, 전도에 투입된 사람이 9,162명,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삶의 숫자는 15,352명이었다. 대전의 집회 이후에 전도요원 훈련 프로그램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국 CCC 가 대전 집회를 마치고 국제 CCC에 보고한 내용에는 “사도행전의 역사”가 매일 일어났다고 하면서 11가지의 기적들을 열거하고 있다.
계속해서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44일까지 춘천 성시화 운동을 진행하였다. 강원 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의 비전과 주님의 전도전략과 훈련 및 강의가 있었다. 이 춘천 성시화대회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한 모델이 되었다. 이 대회 이후에 이어서 1972년 12월부터 1973년 2월까지 10회에 걸쳐 서울 CCC 중앙회관에서 평신도, 교역자, 부녀자들을 민족복음화 요원으로 훈련시켰다.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규모 집회는 Explo '74 대회였다. 이는 미국에서 있었던 Explo 72에서 국제 CCC의 결에 따라서 한국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Explo 74는 한국 기독 교회사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민족복음화 운동을 깊이 각인시키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 대회는 한번 모여서 말씀을 듣고 흩어지는 것이 아닌 35만 명 이상이 1주일 동안 합숙 전도훈련을 받았으며, 저녁 집회를 통해서는 참가자 모두에게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대회였다. 당시 국제 CCC의 대표였던 빌 브라잇은 엑스폴로 74와 관련한 새로운 기록 24가지 중에서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첫째, 일주일 동안 전도와 제자 훈련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합숙훈련이었다.. 즉 78개국에서 323,419명의 등록자가 훈련에 참가하였다. 둘째는, 하루 저녁의 짧은 집회 기간 동안에 최대의 결신자가 생겼다. 세 번째, 교회 사상 최대의 철야기도집회였다. 철야기도는 6일 동안 저녁때에 열렸는데 매일 밤 100만 명의 기도자들이 운집하여 기도하였다. 넷째, 사상 최대의 개인전도 실천이 이루어졌다. 하루 오후에 420만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여 274만 명이 결신하였다. 다섯째, 한 번에 사상 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다. 150만여 명의 참가자들 가운데에서 70% 이상이 성령 충만을 확신하였다. 여섯째, 한 번에 사상 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서 그들의 삶을 헌신하였다. 마지막 집회의 모임 65만 명 중에서 90%가 헌신하였다.
Explo 74는 한국 CCC의 본래 사역인 학원복음화의 단계를 넘는 민족복음화에로의 변이를 가져왔음은 물론 복음주의 이상을 한국교계에 널리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계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 Explo 74를 한국교회의 “정신혁명의 큰 횃불”, “기독교 역사상 회기적인 성회이며 아시아와 세계복음화를 위한 총진군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한국 CCC는 Explo 74 대회 이후에도 많은 대형 집회를 통해서 복음전도의 확산을 가져왔다.. 즉 ‘80 복음화 대성회('80 World Evangelization Crusade), 국제기도성회국제 기도성회(The International Prayer Assembly for World Evangelization '84, '85) 등등 이다. 이러한 대형 집회를 통해서 예수의 계절이 한국 땅에 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민족의 가슴에 심어나갔다.
D. 평신도 활용의 전략
한국 CCC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확산을 위해서 “나사렛 형제들”을 만들어 활용하였다. 나사렛 형제들은 한국 CCC 가 창립된 지 10년만인 1968년에 조직되었다. 일반적으로 CCC 회원이란 대학생으로서 활동하는 동안에 주어진 회원이지만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민족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학생 때에 가졌던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지속시켜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나사렛 형제들이란“차원이 높고 생명이 있는 집단이 민족의 구심력”을 이루기 위해서 조직하였다. 이들 나사렛 형제들은 삼중의 헌신과 다섯 가지의 신앙지침을 가지고 있다. “성서”, “기도”, “전도”, “사랑”, “협심”의 다섯 가지의 신앙지침을 통해서 민족복음화를 실천해 나가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한국 CCC CCC는 나사렛 형제들을 조직함과 아울러 민족복음화 요원으로 훈련시켰다. 나사렛형제들 회원은 1980년대에 215,000명의 나사렛형제들 회원으로 가입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훈련시킨 요원들이 180만 명에 이른다.
박용규는 그의 저서인『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 운동』에서 한국 CCC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구령에 대한 열정, 민족복음화 비전,,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 젊은이 선교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곁들여 한국에서의 초교파 선교단체들이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에 끼친 공헌점에 대해서 여섯 가지 관점에서 언급하였다. 이는 선교단체가 가진 영향력이 한 단체의 생존에 머물지 않는 역동적인 사역을 입증해 주는 말이라고 본다.
나사렛 형제들이 주축이 된 평신도 운동은 다방면에서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 운동으로 확산되어갔다. 영적인 차원에서는 “원단금식기도회”“원단 금식기도회”를 실시하였다. 매년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는 기도회는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다. 또한 사회 지도층을 위해서 크리스천 엠버시 운동, 전군 신자화 운동, 향목, 경목, 원목 제도들이 생겨나도록 만들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국회 조찬기도회 운동이 실시되었다. 이는 정치를 하는 국회의원들이 국사를 논의하기 이전에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라의 경영을 맡기는 기도운동이다. 김준곤 목사는 국회 조찬기도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제가 국회 조찬기도회를 만든 취지는 국회의원들이 복음화가 되고 정치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직장에서는 직장 복음화 운동이 일어났다. 직장복음화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운동이 교사 복음화 운동이다. 1972년에는 전국의 5,000여 명의 교사들을 훈련시키자는 계획 아래1971년 12월 27일부터 1972년 2월15일까지 12차례에 걸쳐서 민족복음화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집회를 통해서 2,000여 명을 일차적으로 훈련시켜나갔다. 또한 경제인, 체육인, 과학자들의 성경공부 모임이 직장들 속에서 만들어졌다. 오늘날 대학의 크리스천 과학부 교수들로 구성된 “창조과학회”도 한국 CCC의 정동 회관에서 현재 한동대 총장으로 사역하고 있는 김영길 박사가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III. 한국 CCC 민족복음화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한국 CCC 가 주도적으로 일으켰던 민족복음화 운동은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필자는 지면 관계상 핵심적인 부분에서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A. 전문 사역자 배출
한국교회에 있어서 차세대를 이끌 지도력을 가진 목사들의 배출을 들 수 있겠다. 젊은 시절에 한국 CCC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나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목회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홍정길, 하용조, 김인중 목사들이 한국 CCC에서 CCC 간사나 순장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김인중 목사는 자신의 글에서 한국 CCC를 통해서 전도활동을 했던 시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는 대학시절, '사영리'로 전도를 하면서 전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이요, 사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버스 간에서 전도하고, 경인선 플랫폼에서도 기차표 끊고 서 있다가 전도했었거든요. 전도하는 일이 기쁨이었으니까요. 대학 재학 시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전도를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그렇다면 나의 전도지는 어디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또한 선교단체를 만들어 세계선교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국제기아대책기구”“국제 기아대책기구”의 윤남중 회장과 같은 기관 소속의 국제개발원 정정섭 원장을 들 수 있다. 한국기아대책기구는 1989년 창립되었다. 이 기구는 1971년 UN에서 인정된 국제 기아대책기구의 한국지부로서 세계 50여 개국에서 2,200여 명의 스텝들이 사역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사업은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에게 긴급구호와 개발사업을 통해서 생존과 자립기반의 길을 열고 있다. 참고로 윤남중 회장은 한국 CCC 초창기 간사로 사역하였고, 정섭 원장은 나사렛 형제들 중앙회장으로 한국 CCC의 산증인들이다. 그리고 두상달 장로는 중동선교회”를 1984년 7월 30일 창립하여 현재 이사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중동선교회의 창립 초기에는 지역 현장 교회와 한인 연합교회의 지원과 중동에서 귀국한 근로자들의 기도모임 위주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중요성과 책임이 부각되면서 해외 파송 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현재 중동 이슬람 지역 30여 개국에 70여 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 지금은 이사장으로서 중동지역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또한 현재 포항의 선린병원 원장으로 일하는 이건오 박사는 아가페 의료선교단을 창립하고 의료인들을 훈련시켜서 파키스탄에 사랑의 선교병원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현재 아가페 의료선교는 국내와 해외선교 가운데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이상에 열거한 이름들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역자들이 목회, 선교, 의료인, 언론, 연예, 스포츠 등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B. 세계복음화 운동
한국 CCC의 모토인 “오늘의 캠퍼스 복음화는 내일의 한국 복음화!! 오늘의 한국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의 표어는 한국 CCC의 기도와 비전 뼈대가 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 한국 CCC는 단순히 국내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11개 지역 학생운동과 복음화를 선도하는 단체로 발돋움하였다.. 따라서 한국 CCC 회원들의 기도는 민족복음화의 지속성과 아울러 세계선교에 맞추어졌다.
세계복음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한국 CCC를 통해서 선교지 무대에 활발하게 등장하였다. 그 대회가 바로 새 생명2000 마닐라 선교대회다. 이 대회는 1990년 4월 5일부터 약 4개월 동안 세계 100개국에서 11만여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하여 필리핀의 마닐라시를 8개 MPTA권역(Million Population Target Area: 인구 100만 단위)에서 개인전도와, 예수영화 상영, 스포츠 등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결신자를 얻고, 그들을 육성하여 현지 교회에 연결시켜주는 입체적인 전도전략이었다. 한국은 한국 CCC의 주도 아래7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3,150여 명의 대학생, 직장인, 목회자 등으로 나누어서 마닐라에 도착하여 100여 개의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대회 이후 한국 CCC의 평가 자료를 통해서 얻어진 통계는 다음과 같다. 총접촉자수 24,282명, 결신자 수 16,453명으로 67.8%의 영접률을 나타냈고, 육성 만남에 연결된 수는 4,576명이었다. 한편 예수 영화나 농구, 태권도 등의 스포츠와 발레 등의 예술 공연의 그룹전도를 통해서 얻어진 접촉한 수는 132,232명이었고 그들 중에서 결신자는 36,806명이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한국팀이 마닐라에서 복음을 증거 하여 얻어진 결신자는 총 53,259명으로 집계되었다. 당시의 한국팀 책임자로 사역을 총지휘했던 김석환은 다음과 같이 10가지 면에서 ‘한국 주도 세계선교’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새 생명2000 마닐라 선교대회는 한국 CCC 가 그동안 민족복음화를 부르짖었던 사역의 패턴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실험대에 올려진 시간이라고 평가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대회 이후에 필리핀에는 많은 교회들이 힘을 얻어서 전도사역에 힘썼으며 필자는 산타 메사 새 생명교회(Sta Mesa New Life Alliance Church)를 창립하여 사역하였다.
한국 CCC는 “새생명 2000 마닐라 선교대회”이후로 방학을 통해서 수련회를 마치고 일본, 대만 등을 포함한 해외의 단기선교 프로젝트를 지속해 오고 있다.
C. 북한을 위한 염소 보내기 운동
한국 CCC 가 주도하여 남북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북한에 염소 보내기 운동이다. 한국 교회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나뉨은 북한 선교에 있어서도 전략의 일치가 되지 않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진보진영에서는 화해의 복음을 표방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민족이 하나가 되자는 의사를 갖고 북한과 접촉하였다. 이러한 경과과정 가운데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의 선언’을 통해서 WCC를 통한 북한교회와의 만남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를 즈음하여 북한을 선교하고자 하는 선교단체들이 생성되었다. 즉 기독교 북한선교회(김창인), 모퉁이돌 선교회(이삭), 통일선교훈련원(조준상) 등이다. 이후 1990년대에 와서는 진보와 보수의 벽을 넘어서는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운동들이다.
분단국가에서 통일을 위한 가교의 역할이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G. 브라이덴슈타인은 “통독에 대한 독일교회의 태도”라는 글에서 언급하기를 “독일복음교회(EKD) 단체 속에는 서독의 2020개 교회는 물론 동독의 88개 교회가 가입되어 있었으며 동독의 정치인들이 포기를 요구하여 동독 교회들 만의 연합체를 구성할 때까지 중요한 하나의 대화의 창구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독일의 상황과는 다르다. 독일과 한국 상황의 비교에서 브라이덴 슈타인 교수는 “... 동독에는 참고 견디는 공인된 교회가 있었으나, 북한 정권은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핍박해 왔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적과 동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정신을 따라야 하며, 위험한 긴장을 해소하는데 기여해야 하며, 끊임없는 평화의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 공동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조언하고 있다.
한철하도 남북관계에 있어서 공통분모로서의 교류의 가능성에 대해서 동구권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동구권은 비록 이념이 다른 체제 아래 있더라도 하나의 정신적 바탕인 기독교(동방교회)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대화의 벽이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는 민족주의가 중요한 대화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동일한 민족, 동일한 언어와 역사를 지니고 있고, 세계에서 공동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공통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 말했다.
한국 CCC가 북한에 염 소보 내기 운동을 시작한 시간은 2000년 7월 6일 CCCCCC 전국 대학생 여름수련회에서 11만 명이 모인 집회가 계기가 되었다. 이 수련회에서 참석자들이 10,352마리의 젖염소를 북한에 보내기로 작정이 되었다. 젖염소를 통해서 생명의 승법 번식이 적용되기를 열망하면서 사업이 시작되었다. 즉 1만여 마리의 염소가 10년이 되면 1,400만 마리로 번식하여 북한의 190만 77천 호의 농가에 젖염소 한 마리씩을 보급하게 함으로써 최소한 굶어 죽는 가정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한국 CCC의 북한 염 소보 내기 운동은 단순한 구제의 기능을 넘어서 민족화해와 남북의 민간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2004년도 북한 젖염소 보내기 운동사 역의 개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업의 주체는 민족화해 협의회와 북한의 조선 농업과학원이다. 2002년 2월 27일 320두를 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18차에 걸쳐서 총 14억 원어치의 물자를 지원하였다. 북한에서의 협력사업지역은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리의 염소 원정 목장이다.. 축사는 1,000평방미터이며 젖염소 662마리를 방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2004년도의 예산은 약 5억 원 정도로 잡고 있다.
한국 CCC의 북한 염 소보 내기 운동은 포괄적인 의미의 선교로 보아야 한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분리된 상태에 있지만 북한도 엄연히 우리의 동족이다. 죤 스토트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선교를 언급했다. 김준곤 목사는 북한의 염소 보내기 운동을 민족복음화의 연장선상에서 언급하고 있다 “공산 혁명이 휩쓸고 간 페허의 땅 북한에도, 죄악과 비리와 불의가 난무하는 남한 땅에도 혁명의 개념을 혁명한 예수의 혁명으로, 이 수년 내에 대부흥이 일어나(합 3:2) 니느웨 성처럼 회개한 민족, 해골 떼가 생명의 군대로 부활한(겔 37장) 민족, 성민 코리아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결론
한국 CCC는 1958년에 김준곤 목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김준곤 목사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많은 고난과 함께 성장하면서 “민족복음화”에 대한 꿈을 가지고 성장하였다. 그가 한국교회 속에서 일으킨 민족복음화 운동은 산업사회 속에서 구심력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진리 가운데 삶의 좌표를 설정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모든 영역 속에 크나큰 영향력을 주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서 사용되어질 때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례들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민족복음화 운동의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숫적 통계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한국 CCC가 민족복음화 운동을 일으킨 당시인 1973년의 한국교회 전 성도는 약 300만명 이었다. 그러나 1010년 후에는 약 3배로 증가한 1000만 명이 되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은 세계교회로부터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가.
현재의 한국사회는 시대의 주류에 따라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분출되고 있다. 특히 대형교회와 선교단체들에 대한 재평가의 작업이 부정적인 요소들만 들추어내는 듯한 감도 없지 않다. 한국 CCC도 재평가의 도마 위에 오른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냉소적인 사조들 속에서도 분명한 평가가 있다. 그것은 김준곤 목사와 한국 CCC 가 이루어 놓은 민족복음화 운동의 사역들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이제 필자는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한국 CCC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해외에서 건너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선교사 파송 제2위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교회를 통해서 만들어진 선교단체를 통해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선교활동이 극대화되어야 하겠다.
2004년 "한국복음주의 신학회에서 선교분과 위원회에서 발표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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