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eyard Movement의 평가에 관한 연구

2020. 4. 22. 17:11선교학 강의

Vineyard Movement의 평가에 관한 연구

조귀삼

들어가는 말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다원화된 틀은 사회적 현상일 수 도 있고 또한 종교적 현상 일수도 있다. 다원화된 종교 속에서의 기독교의 정형도 수 없이 많은 도전을 받아 왔다. 이러한 양태 속에서 기독교회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은혜 전달의 방편은 그 주체가 말씀이 되고 성서가 되고 고백하는 언표 된 교리가 되었다.

한국교계는 지금 엄청난 몸살을 앓고있다. 세계의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도로 성장하던 교회성장도 멈칫하고 있고, 기독교가 사분 오열되어 하나의 목소리르 내지 못한 가운데 급속도로 변화되어가는 사회에의 적응력과 창조력에 자꾸 뒤져만 가는 감이 있다. 이러한 변화의 악순환은 무넜보다도 신학의 변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변적신학들이 교회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이고 또한 세속적 물량주의가 교회 속에도 자리 잡게 되면서 교회의 고유한 생명력(영성)을 잃어 버린데에서 크나큰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러한 세속적 영향가운데 하나가 문화적 형태로 나타난 포스트 모던니즘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의 우리 속에 다가온 포스트모더니즘도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파문들 속에서 우리 속에 성큼 가다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기존의 대안들과는 다른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도들을 드러낸 한 양태로서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흑백논리에서 탈 냉전시대로 오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새대에로의 전황이라고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겠다.

한국교회에 Vineyard movement가 들어온지 약 2년 여가 되었다. , 19956월호의 목회와 신학의 기고된 글을 보았을 때에만 해도 거침없이 이 운동을 교회가 받아 드렸다. 이 운동은 90년대 초부터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 급속도로 파급효과가 컸다.. 특히 구미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의 의식 속에 은사와 아울러 서구의 신앙운동을 도입하고자 하는 마음과 맛 물려 너도 나도 이 운동의 진원지를 향하여 달려가 배우는 진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운동이 뿌리를 내릴 즈음부터 신학계와 건전한 교회의 목회자 및 평신도들에게서 무엇인가 우리와는 다르다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19963월 교회와 신앙 잡지에 특집으로 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 인가가 발표 되었고, 1996419-20일 에는 한국복음주의 교수 신학회에서 ““현대 성령론 평가에서 주로 빈야드 운동에 관한 의견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운동을 선교신학적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필자의 문제 제기이다.. 따라서 필자는 빈야드 운동에 대한 평가를 다음의 글에서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I. Vineyard Movement 이해를 위한 세계관

A. 서구 세계관과 은사

세계관 이란 하나의 문화와 행동 뒤에 놓인 실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관을 알고 있다는 것은 선교학적인 접근에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교회에 크나큰 파문을 던지고 있는 Vineyard Movement를 보는 시야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 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Movement를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세가지의 접근 방법이 필요된다. 첫째는, 현상학적 차원(Phenomenological Level)로서 이는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 에미크적 접근(emic)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존재론적인 분석(Ontological Level)으로서 이는 수면하에서 진정한 실체를 보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에틱(etic)적인 접근 방법 이라고도 한다. 또 하나의 분석은 선교학적 차원의 분석(Missiological Level)이라고 한다. 특히 선교학적인 분석 방법이란 에미크적으로 타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함을 통해서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에서 탈피할 수 있다. 또한 에틱적 진리를 발견하므로서, 상대주의와 단편적인 지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서구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은 경험주의, 과학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세계관으로 이러한 것은 계몽주의의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구분은 보통 30년간 종교전쟁의 종결(1648)로부터 프랑스 혁명(1789)때 까지 이다. 종교전쟁(1618-1648) 으로 말미암은 전 유럽의 피폐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격동의 산물임을 느끼게 하였다. 따라서 이제는 이성에 근거한 인간의 문제를 냉철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종교개혁이 일으켰던 복음의 생명력과 부흥의 물결을 가라안챠 버리고 교회들이 교리와 신조의 정통성에 얽매여서 교회의 권위 구조를 고수하려는 경향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결과적 으로 16세기 말부터 17세기의 대부분은 서구 세계에 있어서 지루하고도 쓰라린 신학적 논쟁들로 점철되었고 급기야는 종교전쟁으로 까지 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계몽주의 사조는 이 시대에 커다란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톤 등의 업적의 결과에 기인한 과학의 혁명이요,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의 혁명 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중세 시대와는 다른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즉 중세시대의 특징인 초자연적인 능력들에 대한 의존, 외부 권위에 대한 복종, 영원에 대한 시간의 종속, 인간의 죄와 세상의 악에 대한 우울한 인식, 실재에 대한 정적인 해석 그리고 개선의 여지란 오직 죽은 저편의 다른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이 깨어지고 이제 우주는 자연법칙으로 가득 찬 기계적 세계이며 인간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사고하는 주체인 인간 자신외에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며 만물의 척도는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서구 문화는 초자연적 권위로부터 탈피하여 세속주의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현대 기독교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전통이 아니라 17세기 계몽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서구의 신학이 유대-기독교적(Judeo-Christian foundation)보다 세속주의적 세계관의 기초위에 서 있다는 지적이다.. 비록 서구 사회가 다원주의적이며,, 그 기본 구조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극히 개방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서구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이교적(pagan)이며 반 기독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서구의 세속화된 사고 방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초자연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며, 오직 경험적인 방법과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이성을 모든 판단의 척도로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적(historical-critical) 연구(historical-critical) 방법을 적용하게 만듬으로 결국 성경을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단순한 고문서로서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성경이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과학적인 분석 방법에 의해서만 해석 되어져야 한다는 흐름으로 성경 계시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성경의 권위를 위축 시켜 버렸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서구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기적들과 축귀, 악령을 몰아 내는 일 등을 이해하거나 받아 드리는데 인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결과로서 선교사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행한 능력 전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단순한 미신적인 요소로 간주해 버렸다.

B. 성경의 세계관과 은사

성경적인 세계관은 초월적인 세계경험적인 세계사이의 장벽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열어주는 것이지 허물어 버림이 아니다는 뜻이다. 만약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 버린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마치 범신론적인 세계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영적인 세계와 현상적인 세계 사이에 신비의 공간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데 질병의 원인으로 마귀의 역사와 단순한 물리적인 이유를 모두 다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닐 앤더슨은 그의 책 이제 자유 입니다에서 어두움의 실재에 대해서 그의 목회 사역의 경험을 설명하면서 인정하였다.. 또 다른 사람인 레베카 브라운은 의사로서 occultism에 매여 있는 자들을 구출해 내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도 질병의 원인이 단순한 물리적인 현상 만이 아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정령 숭배자들이나 유물론과 같은 극단적인 사고방식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하여야 하며 지상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인 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도식화할 경우에는 초월적인 세계” “지상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인 세계그리고 경험적인 세계를 인정하여야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자신의 세계관 으로부터 지상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인 세력을 제외시켜 버리고 마는데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초기 사역들이 대부분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그분의 제자의 세대인 사도시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 Vineyard Movement 이해를 돕기 위한 초대교회 은사

성령의 은사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성령 은사의 단회 성과 연속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학자들에 따라서 로마서 12, 고린도 전서 12, 에베소서 4장에 언급된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견해와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 볼 때에 예언과 방언은 이미 중단되었다는 견해들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은사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을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A. 사도직의 일시성과 은사

초대교회의 은사는 주로 사도들에 의해서 나타나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도들의 시대가 감에 따라서 은사가 중지되었다는 견해가 사도직의 일시성이다.. 이는 사도라는 특이성이 말해 주고 있다. 첫째,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눈과 귀로) 여야) 했다(15:27, 1:8,22; 10:41).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롬 1:1,고전 1:1, etc)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9:3-8; 22:6-11; 26:12-18 고전 9:1; 15:8,9 참조). 둘째,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 사도라고 말한다(고전 15:8,9). , 그는 "맨 나중에"라고" 표현 함으로써 스스로 마지막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엔 교회 속에서의 다양한 직분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과 복음 사역자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였는데,, 이는 비록 자신의 수 제자인 디모데 에게도 사도라는 직분을 부여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도직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은사가 사도 이후 시대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의 권위가 약화된 것만은 아니다. 더욱이 사도적 또는 후 사도적(apostolic-postapostolic)의 구분은 신약성경 자체가 구분하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억지로 구분할 수는 없다.

B. 사도적 증거의 창설 성과 은사

사도들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의 하나는 이미 암시한 대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15:27, 1:8; 13:31).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친히 권위와 능력을 받아서 언약사의 성취인 부활을 증거 했다(눅(눅 24:48, 1:22; 2:32; 4:33; 10:39-4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핵심으로서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부활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포괄적으로 해석 증거 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증거 하는 사도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도들이며, 계시를 받아서 전했다는 점에서의 사도들이다(엡(엡 3:5).

C. 예언의 창설 성과 은사

에베소서 2:20에 의하면, 바울은 교회의 기초되신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면서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수식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식은 적어도 네 가지의 문맥적인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이 문맥에 의하면 교회의 터를 위하여 사도와 예언자들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언의 창설 성은 신약 정경이 확정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두 가지의 일을 완성하였다.. 하나는 마침내 정경으로 인정된 책(계시록)을 산출함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 창설기에 특수하게 나타난 정경 형성기와 관계된 그 당시의 교회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은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지에 의하면 바울을 비롯한 몇몇 사도들은 신약 정경의 일부로서 영속적으로 교회에 봉사할 문서 계시를 산출함에 있어서 탁월한 역할을 한 반면에 예언자들과 함께 대다수의 사도들은 그 창설 시기에만 교회에 필요했던 계시를 받았다. 신약의 정경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가 추가되어 정경의 단위가 보강되어야 된다고 말할 때에는 성경이 말하는 언약 성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된다..

III. Vineyard Movement

빈야드 운동에 대한 논란이 한국 신학계를 강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능력 목회의 파도가 몰려온다 이후에 급기야 한국 개혁주의 신학 연구소 주최로 빈야드 운동은 과연 어떤 운동인가?”가 발표됨으로써 논쟁에 불을 붙였고,, 필자가 소속된 복음주의 교수 협의회에서도964월에 총회와 함께 국내의 유수한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토론하도록 되어 있음을 보아서도 분명 한국교회의 선교현장에 중요한 이슈로 작용됨을 알 수 있다.

A. Vineyard Movement의 정의

빈야드 운동은 존 윔버 목사를 중심으로 빈야드 크리스천 펠로우쉽에 소속된 교회와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사역을 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운동이다.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는 존 윔버(John Wimber)로서 1996년 현재 62세가 되었으며, 그가 태어나서 예수님을 영접했던1962년 당시에는 4대째 불신자의 집에서 기독교적인 교육에 접할 기회가 없어서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회심 이후 그는 직관적인 통찰력에 의한 전도를 실시하였다. 1974년부터 풀러 전도 및 교회성장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엥겔 척도에 관하여 배웠다. 엥겔 척도란 사람들이 회심 과정에 작용하는 지적인 요인과 태도적인 요인을 단계별로 모델화 한 것으로서 사회에는 회심의 시기가 도래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며 이들의 복음에 대한 개방성은 지적인 요인과 태도적인 요인 모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존 윔버는 풀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박사의 영향과 조지 래드(George Eldon Ladd) 박사의 영향에 힘입어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역시 타당한 것이라는 확신 하였다. 1978년 풀러연구소를 떠나서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서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이라는 명칭의 교회를 담당하였다.

B. Vineyard Movement의 확산

존 윔버는 교회를 담당한 후부 터10개월간 누가복음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에 관한 설교를 하였지만 별반 소득이 없는 체험과 함께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너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말을 설교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이러한 음성을 듣는 이후에 교우 한 사람의 치유 기도 이후에 환자의 치유를 보고서 실제적인 치료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확산은 그가 1981년 목회 현장에서 체험한 표적과 기사를 피터 와그너의 제의에 따라서 풀러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즉 MC 510 (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확산의 길을 열었으며, 후일 반대하는 교수들로 인하여 1985년에는 중단되기도 하였다.

윔버는 1985년 빈야드 교회 연합체를 조직하였다. 이는 하나의 교단을 의미하며 전 세계적으로 600여 교회가 가입하게 되었고, 세계적 으로 700여 교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그가 목회하였던 아나하임 빈야드 교회는 1977년에 50여 명이었던 교인이 1983년에는 3,000명이 되었고, 1987년에는 5,000여 명이 되었다.

이와 같은 빈야드 운동의 확산은 한국땅에도 상륙하여 이미 빈야드 세미나 집회에 참석한 숫자가 목회자 800여명, 그리고 평신도가 200여 명에 달하여 벌써 1,000여 명이 빈야드 운동에 직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C. Vineyard Movement and 1, 2 Waves

Vineyard Movement 운동은 성령의 제3의 물결의 흐름과 함께 확산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금세기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즉, 제 1제1의 물결은 19세기 초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이며, 제2의 물결은 1960년대에 시작하여 개신교 주요 교파들과 가톨릭 교회에 미쳤던 은사 운동이었으며,, 이제는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에게 영향을 미칠 제3의 물결이 도래될 것을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제3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된1,2차의 성령의 물결이라 불리는 영적인 흐름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 제 1 제1의 물결(The First Wave)

이 운동은 1901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1950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오순절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초창기에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지 않고 기존 교회들 안에서 은사주의 부흥 운동을 하였지만 결국 1909년 주요 교단들로부터 배척을 당함과 함께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게 된 운동이었다.. 오순절 교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회심 이후에성령의 세례라 부르는 제2의 체험을 하여야 한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을 완전한 성화”‘ 또는 증거와 봉사를 위한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과 관련되어있다..

1906년 이후로 오순절 교단이 기존의 성결/완전주의 교단과 구별되게 강조한 것은 성령세례 받은 것의 증거로서 “방언” 이었다. 대부분의 오순절 교단에서는 방언을 강조하고 있지만 교우 전체의 35%만이 방언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초대교회 이후에 알려진 다음의 은사들 중에서 하나 이상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들 은사들은, 성화 및 예언의 능력, 기도를 통한 신적 치유의 능력, 방언과 방언 통역, 방언 찬양, 성령 안에서의 찬양,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 꿈과 환상, 영분별,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기적의 강조, 능력 대결 및 축사, 기사와 표적들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였다.

제 1제1의 물결은 한국의 신앙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길선주, 이용도, 이성봉, 김익두 등의 신앙 흐름을 말할 수 있으며, 급진적으로 흘러 악영향을 미쳤던 부분으로는 황국주, 백남주, 유명화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reaction) 으로서는 교리와 교단 성의 강화를 들 수 있다.

2. 제 2 제2의 물결(The Secend Wave)

성령의 제2의2 물결 운동 이란 1960년대와 70년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성령 안에서 새로워지는 경험과 성령의 초자연 적이고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한 자들로서 카토릭, 성공회, 루터교회를 포함한 비 오순절 계통의 보다 오래된 기존의 교단에 남아서 교회의 갱신 그룹을 만든 사람 들이다.

이들 그룹들은 성령의 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라는 표현보다 자신들의 은사주의적 갱신으로서 진입 경험을 성령 안에서 세례 받는 것”으로” 표현하기를 즐겨한다. 이는 성령의 능력을 역동적인 과정으로서 경험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카토릭 쪽에서의 성령 안에서 세례 받은 것이란 해석은 성령을 첫 번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개봉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기사와 표적을 포함하여 모든 성령의 은사들을 주장하는데 방언은 오순절 주의자들과 같이 크게 강조하지 아니하며 선택적으로 강조한다. 1965년 이래로 수천 개의 그룹들이 이 운동에 합류하여 커다란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교회의 밖에서, 즉 교회 개척이나 전도에 있어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제1의 물결의 여진인 오순절 교회와 급진적으로 전도관의 유형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한편 교회의 반동으로는 성경의 교육과 제자훈련, 신학의 발전 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3. 제 3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이 물결은 1980년대를 즈음하여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들과 단체들 가운데서 자신들이 오순절 주의나 은사 주의자들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어 감으로 시작되었다.. 피터 와그너는 이 운동이분리의 부재(the absence of divisiveness)라고 보았다.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주의 운동의 배경이 없는 많은 교회들이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증거 하면서 과거에 있었던 운동들의 부적절했던 것들을 탈피해 보고자 하는 양상이다..

윔버는 이 운동을온전케 하는 물결(An equipping wave)”라고 보는데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다른 모든 은사들을 경험하도록 격려하는 성격을 의미한다. 제 3제3의 물결 주의자들은 성령의 세례혹은 성령 안에서 세례 받아지는 것대신에 성령 충만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 덧입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성령의 능력의 만남을 영적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 중요한 하나의 단계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중에 대부분이 갱생의 경험”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능력과의 최초의 만남을 중요하다고 보지만 계속적인 충만해 짐이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갱신운동은 오늘날 세계의 230여 개 국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유럽 대륙은 다른 곳보다 오순절 운동에 낮은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는 그들이 제1의1 물결을 거부해 버린 결과로 보아야 한다. 당시만 하여도 그들이 국가 교회를 떠나서 오순절 운동에 참여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이라 불리는 빈야드 운동의 토론토 부레싱(Toronto Blessing)에 20만 명이 참가하였고,, 이들 중에 10,000여 명이 성직자였다.. 이들 참가자들 중에서 40%가 영국의 국교회 지도자들이며, 현재의 영국교회의 2,500-4,000여 개의 교회들이 토론토 축복과 같은 영적 체험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영적인 축복의 결과 교회들이 소생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 3제3의 물결이라고 부르는 빈야드 운동의 국내의 교회는 아직 판단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편이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기존 복음주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이 이 운동의 현장을 다녀왔고,, 이미 언급한 데로 지난 19956월호의 목회와 신학에 긍정적으로 글을 써서 기고한 교수들이 많았다는 데 있다. 한편 이에 반작용으로 최근에는 빈야드 운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신학계에서 새롭게 대두되어진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제 3제3의 물결의 급진주의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 이미 종언을 고한 다미선교회나 이초석의 새 예루살렘 운동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D. Vineyard Movement의 영적 특성들

빈야드 운동의 영적 특성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특성들을 논함에 있어서 그동안 발표되었던 긍정적인 측면의 글들을 먼저 살펴보고 난 후에 신학적인 평가를 객관적인 나의 관점으로 논하고자 한다.

1. 치유의 은사

윔버의 사역 가운데 특징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은사는 치유의 은사이다.. 치유사역의 영역을 다섯 가지로 나눈다.

이는 첫째, 영의 치유로서 죄로 인하여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것이다. 둘째는, 과거로부터 오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내적치유(inner healing)라고 한다. 셋째는, 귀신 들림과 정신질환의 치유이다.. 악한 영에 의한 외부적인 영향 이던지, 내부적으로 오는 감정상의 혼란 이던지 간에 치유를 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이다.. 이는 사고로 손상된 상처나 병균의 감염으로 오는 병의 치유를 말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자에 대한 치유를 말한다.

윔버의 이러한 치유 사역은 또한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치유를 감당한다. 제 1단계는, 면담을 하며, 제 2단계는, 진단을 하고, 제 3단계는, 기도의 선택을 하며, 제 4단계는, 기도의 시행과, 마지막 다섯 단계는, 기도 후의 지시사항을 말한다. 윔버의 치유 사역은 예배 중에도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평신도 사역팀의 안수 기도로서, 설교를 마치고 기도 순서가 되면 사역훈련을 받은 평신도 사역팀(ministry team)에 의하여 기도가 진행되어진다..

윔버는 이러한 치유의 사역을 통하여 기도받은 자의 20% 이상이 치유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지식의 은사

윔버는 자신의 지식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는 근거를 그의 체험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시카고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어느 신사의 이마 위에 간통이라고 쓰인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을 회개시킨 것을 말했다. 이러한 윔버의 지식의 은사를 이재범 목사는 데이비드 피치스의 주장을 들어서 변증 하였는데 이는, “지식의 말씀이란 어떠한 사람이나 상항에 관한 사실들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3. 성령 안에서의 안식

일반적으로 개혁 주의자들은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 하지만, 빈야드 운동 주의자들은 육체의 특이한 현상을 필수요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체에 일어난 특수한 현상 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두 번째는, 꼬꾸라 지는 현상이다.. 이러한 체험은 결국 사 역자로 하여금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말한다. 셋째는, 술 취한 듯한 행도이다.. 넷째는 몸부림을 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성적인 범죄로 인 하여 나타나는 내적 갈 등의 표출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육체적 나타남(physical manifestation)”을 말하는데 최근에는 사자처럼 울부짖음, 성령춤, 뛰어오름, 성령에 취함, 심한 울음,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울기도 한다.

빈야드 교회를 통해서 19947월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였다는 김현석 목사의 체험담은 다음과 같다. “한 여인이 다가와서 손을 뻗치고 기도하는 순간, 성령의 강한 임재 하심으로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도 느낄 새가 없이 그 자리에 뒤로 넘어졌으며, 누운 상태에서 온몸이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내에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있은 후부터 김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 거룩한 웃음

1984년 윔버가 풀러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에 남아프리카에서 온 어느 학생이 갑자기 끽끽 웃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을 모르고 웃음을 터뜨리는 이후에 많은 집회 때마다 웃음의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빈야드의 옹호론 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거룩한 웃음(holy laughter)라고 명한다.

이상에서 필자는 다양하게 빈야드 운동에서 주장하고 있는 다양한 은사들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은사들과 함께 예배시간을 파괴해 버리는 부분과 예배 시간에 입고 나온 복장들이 평상복 차림의 부분과 주보가 없이 성령의 인도 아래 드리는 예배 순서와 경배와 찬양을 통해 그들이 말한 빈야드 찬양은 은사 외적인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IV. Vineyard Movement의 신학적 진단

A. 죤 윔버의 신학

죤 윔버의 신학적 배경은 첫째는 퀘이커적인 신앙을 가졌다. 윔버는 아주사 퍼시픽(Azusa Pacific Univ.)에서 성서 신학 분야의 학사 학위를 받고, “1970년에 형제교단(Friends)에서 안수를 받고 그 후5년간 캘리포니아 주의 요르바 린다 형제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봉사하였다.. 퀘이커 교도의 신앙은 친우회라고 불리는 신앙 단체로서 17세기 중엽에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에서 생겨난 기독교 단체로서 신조나 목사, 그 밖의 교회의 형식이 없이 하나님을 내적으로 직접 받아 드림으로서 생을 헌신하였다.. 김성봉 박사는 퀘이커 교도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그들은 내면의 빛(the inward Light)”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한 주제인데,, 이 빛은 양심이나 이성에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모든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빛이다“라고“ 하면서 이 빛이 양심을 깨우쳐서 다시 이성에게 명령을 내린다 “고“ 하였다. 특히 이들 퀘이커 교도들에게는 모든 객관적 것들인 성경, 그리스도, 교회, 직임, 성례는 도외시된다고 하였다. 윔버의 신학은 비록 풀러 신학교에서 신약 신학자 래드 같은 교수 에세서 신앙 체계를 수립하였다고 하나 근본적으로 퀘이커 교도의 연속 선상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체험 우선주의의 신앙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체험 우선주의 신앙은 그의 치유 신학에서 나타나는데, 질병과 가난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치유사역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윔버가 경험한 직관과 투시의 현상은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간직해야 할 신학은 되지 못한다. 윔버가 경험한 것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다미선교회를 살펴보면 직관과 투시가 얼마나 위험한 신학의 요소가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직관과 투시 이전에 분명히 말씀의 기초가 최우선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B. 존 윔버의 성령 이해

존 윔버의 성령 이해는 사도행전의 표적에 집중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속사의 시간 속에서 어떤 특정 시대에 더욱 강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지만, 성령의 역사를 사도행전의 모델로만 집중시킬 수 은 없다. 왜냐하면, 창조사역 속에서도 그의 크고 비밀한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해를 위하여 총신대의 김지찬 교수의 글을 참고함이 옳을 듯하다. 이스라엘 초기에서부터 나타났던 성령의 사역들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고(창 1:2) 생명을 부여하신 생명의 원리 이셨으며,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신(41:38)이셨다. 사사시대와 왕정 시대에는, 구속사의 도구로서의 여호와의 신 이셨다. 한편 악한 영과 거짓 영(삼상(삼상 18:10; 19:9)이 존재함을 말해 주는 시대 이기도 하였다. 한편 성령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선지자 시대에는 이적과 권능의 신, 윤리적 성격의 여호와 신, 새 창조의 영으로 성령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포로 후기와 회복의 시대에는 실현된(already) 종말론의(already) 신이며,, 지연된(not yet) 종말론의 신으로 설명하였다.. 신약에서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카리스마”, “프뉴마티 코스”,프뉴마티코스 “도레아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용어들이 특수한 사람이나 혹은 방언, 예언, 신유 등 특수한 은사들에 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용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축복, 구원 사건, 성령 자신은 물론 성령을 포함하여,, 특수한 사명과 능력을 부여받은 사도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 교회 봉사와 신자의 사회적 책임에 필요한 여러 분야의 사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 단순한 개인의 소유의 개념을 초월하여 책임의 윤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윔버의 성령론은 다분히 신비주의적 현상으로서 너무 편협적인 이해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V. Vineyard Movement에 대한 대책

1. 윤리성이 강조된 성령운동으로 순화해야 함

Vineyard movement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책을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성령의 역사와 미혹의 역사를 구분하는 신학적 안목이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미혹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예언과 방언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8:3-13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인 빌립이 행한 성령의 능력과 마술사 시몬이 행한 능력이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마술사 시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첫째, 그의 능력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이며,, 두 번째는 그가 회개하고 진실로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에 이르렀느냐 하는 문제이다.. 첫 번째 해답은 자명하게 그의 능력은 마귀에게서 왔다. 헬라말로 “마술과 요술을 행하는 것(practiced sorcery and magic)”은 분명히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는 공히 사단의 능력이다.. 또한 마술사 시몬이 구원을 받았는가. Stanley D. Toussaint는 말하기를 그는 7가지의 논증에 의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빈야드 운동도 윤리성이 강조된 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본다. 즉 번영의 신학에 물든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안녕의 차원을 벗어나서 사회와 이웃의 책임을 통감하는 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하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이후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자들은 한결같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를 경험하여 왔다. 즉 외슬 리의 성령체험 이후의 삶은 사회와 국가 속에서 확실한 신앙 체계를 통해 그들 사회가 않고 잇었던 불합리와 비인간적인 삶의 현장이 변화되었던 운동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의 교회사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이미 하였다. 전도관을 운영했던 교주 박태선, 통일교의, 문선명, 등등이 참된 성령의 역사와는 다른 것들을 통해서 순수 기독교를 혼돈에 빠지게 한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빈야드의 운동이 개개인의 엑시타시적인 경험에만 그치지 말고 인격적인 성령의 역할을 많이 간조 하여야 할 줄 믿는다.

2. 성령 열매의 지속성 유지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크게 대별해 볼 수 있다(5:22). 우리는 표면적으로 그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나타났느냐가 아니라 능력을 받은 사람의 삶의 열매가 중요하다. 즉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열매의 중요한 요소는, 첫째,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성경의 말씀과 기독교의 정통교리에 일치하느냐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의 대속을 증거 하는 영이다. 세 번째의 성령의 역사 요소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세우나 사단의 역사는 교회를 파괴한다.. 은사 운동의 잘못으로 인하여 교회가 두 동강이 난 경우를 허다하게 보아왔다.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그동안 말씀 안에서 양육하고 있는 담임 목사의 가르침을 전면 부인해 버림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분열은 성령의 열매가 분명히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빈야드 운동은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표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에서 잔잔히 흘러나와 세계를 먹이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국교회는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일종의 착복 내지 횡령을 당했던 경험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3. 성령의 주되심의 역할 강조

성령의 역사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강조하고 선포하였다.성령으로 나지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바울이 이 말을 한 의도는 성령의 감동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아무도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7:21), 기독교 신조를 신실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고백하는 자가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고백한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의 고백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뚜렷한 고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고백할 때에 우리 속에 있는 어떤 특별한 표적에 의하여 고백할 수는 없다. 성령은 인격 이시다. 그는 지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다 함께 가지신 분이다. 주님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인격 속에 소위 거룩한 웃음”이라는” 능력을 통해서 “사자울음소리”“사자 울음소리”를 내어야 은혜와 능력이 임한다고 가르친 일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사용하신다.. 물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임재를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초자연적 요소는 빈야드 운동이 주장한 것처럼 몸부림치며, 나뒹구는 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라고 바른 해석을 할 수는 없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입술과 행동과 열매를 통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게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의 고백처럼 고백되어야 하며, 이러한 고백처럼 순교할 수 있는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의 신앙이 바로서야 할 것으로 본다.

결 론

지금까지 필자는 인간이 가진 세계관과 하나님의 은사의 역사성 그리고 이러한 은사가 현대 우리 교회 속에 나타난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아직은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확실히 꼬집어서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기독교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는 운동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지속적으로 사용될 줄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바람직하게 이 운동이 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제언들을 결론으로 담고자 한다.

첫째, 지속적이고 간절한 기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1:14). 둘째, 성경 중심의 운동이 되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쳐지고 전파되기에 힘써야 함과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셋째,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난 주의 사랑이 개개인의 생활과 사회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2:4-27). 넷째는, 선교적인 역할에 맞추어야 한다.

2001년 아세아 엽 합신 학대 학교 대학원 소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