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시대의 선교

2020. 5. 13. 12:59선교학 강의

중간 시대의 선교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구약성경 말라기로부터 신약 시대 사이의 기간인 4세기를 교회사적인 말로서 흔히들 중간기 또는 암흑기라고 한다.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은 유대 디아스포라의 유래와 함께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앗수르 (B.C 722) 와 바벨론 침공 (B.C 586)으로 말미암아 포로가 되어서 삶의 터를 잃고 고국인 유대를 떠나서 지중해 연안에 디아스포라(Diaspora) 되어져 살았다. 이후에 로마제국의 지배지역을 중심으로 이집트,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 이태리 등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디아스포라된 유대인의 숫자는 약 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기간은 다른 표현으로 암흑기라고도 말한다. 즉 이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시는 기간이라는 뜻이다. 구약신학자인 레온 우드(Leon Wood)도 구약역사의 종말을 쓰면서 말하기를 느헤미야 시대 이후의 역사에 관해서 주어진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암흑기라고 일컬어지는 중간사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시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교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이 기간 동안에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속성상 시간적 영원성 (90:2; 102: 26) 속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결코 침묵 하실 수 없는 속성을 가지셨다. 어쩌면 이 시기는 새벽이 오기 전에 대지가 고요한 것과 같은 침묵의 시간(silent time)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레이몬드 설 버그(Raymond F. Surburg)는 말하기를 선민 이스라엘이 겪은 중간사 시대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발전은, 강대한 왕조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세 차례나 바꾸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커다랗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 에게는 B.C. 596년 에서 A.D. 70년에 이르는 기간은 하나의 결정적인 시기였는데,, 이는 B.C. 605 년과 B.C 596년에 있었던 국외 이주는 수세기 동안에 유대 땅에 집중되었던 유대인들의 삶의 근거지를 근동과 중동, 소아시아, 유럽과 로마 지역으로 확산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자의(自意)에 의해서가 아닌 타의(他意)에 의해서 이러한 흩어짐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교전략 가운데 그동안 일관되게 다루어 왔던 구심력적인 선교(Centripetal)에서 원심력의 선교(Centrifugal)에로의 전환을 위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 가운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중간시대의 하나님의 선교가 가진 의미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1. 회당제도(The institution of the Synagogue)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 허락을 받아서 훼파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국하지 않고 삶의 터를 그동안 살던 곳에서 정착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이 간직한 문화와 종교성이 퇴색하게 되었다. 이에 교육과 종교생활의 목적으로 회당제도가 설립되었다. 이스라엘의 공적 교육은 회당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대의 교육은 대부분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학생의 어머니는 교사였으며 구두 교육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가장인 아버지로부터 가정에서 율법의 구절들과 기도문, 노래들을 배우고 절기를 통해서 역사를 배웠다. 유대인 어린이들은 외세의 지배 및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히브리어가 상용어가 아닌 주재국의 언어를 상용화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유대인의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정을 벗어난 교육의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회당은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비록 정착지에서 사회 경제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들은 항상 선민의식 속에서 살았다. 그들이 가진 특수주의(Particularism) 속에서 당연히 신정(神政)의식은 종교적 모임체인 회당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회당의 시초에 대해서 분명치 않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지만 주전 3세기에는 이집트에, 주전 2세기에는 안디옥에 회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회당의 대부분의 건물은 대게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으며, 긴 장방형의 집으로 건립되었다.. 입구에는 물이든 대야가 있어서 예배 전에 손을 씻으므로 정결한 몸가짐을 가질 수 있었고, 기도실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졌고,, 한쪽 벽에는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예배 때 꺼내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회당 제도를 통하여 유대인의 종교적 유산은 물론 문화와 교육의 유산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회당은 그들의 사회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10 가정이 모이면 어디에서나 회당이 성립되었다. 비록 회당은 분명히 교육기관이지만 유대 땅을 떠나서 예배처가 없었던 디아스포라들은 회당이 곧 예배 장소였다.. 안식일에는 예배의 순서 속에 쉐마 (6: 4-5) 낭송, 기도, 성경낭독, 권면, 축도 등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회당은 선교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즉 회당은 성전과는 달리 모든 이방인들에게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배타적인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들 보다는 유대민족 분산 시기의 공동체는 이방인에게 개방적이었다. 이러한 개방은 이방인들의 회당출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개종을 가져오게 되었다. 개종된 그들은 엄격한 유대주의 율법인 할례, 세례, 제사와 같은 외적인 형태 보다는 하나님 한 분을 믿게 하는데 더욱 정렬적이었다.. 회당 공동체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의 구성체가 있다. 즉 순수 혈통의 유대인, 일반 개종자(할레까지 받은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할례는 받지 않았으나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들)로 구분한다. 죤 휘필드는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만들기보다는 모든 열방을 그 구별된 상태에서 불러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순종케 함으로써 개종 사역을 감당하게 하였다”라고” 말했다.

회당 제도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의 선교는 점차 유대 땅을 넘어서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세계 속에 자리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어느 지역을 가던지 회당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모인 회중들에게 증거 하였다. 이는 회당이 선교의 도구로 크게 쓰였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유일신 사상(Monotheism)의 확대

희랍의 신화와 로마의 문화가 말해 주듯이 당시의 로마 세계는 다신교의 소굴이었다. 헬라인들은 30,000여 개에 달하는 신()들을 섬겼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정욕적인 신들로서 신전에는 공적인 매음행위가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모습이었다. 이에 반하여 유대인들은 선민의식 속에서 유일신 사상을 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일신 사상은 선교의 확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헬라 철학 속에 있는 신들은 지고한 위치에 있어서 사변의 대상이 되는 신이고, 샤머니즘과 자연 종교 속에서의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신들은 부도덕의 상징이 되었다면, 유일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대인들의 신관(神觀) 이야말로 탐구적인 헬라 세계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허버트 케인은 말하기를 이 당시에 유대인들이 전파하였던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인 하나님, 권능이 있으시면 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죄를 벌하시고 덕을 상주시는 하나님으로 증거 하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유일신 사상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의식 속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들은 예배 때마다 가장 먼저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주 하나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너의 모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신 6:4-5)”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고백이 있는 후 찬양의 기도를 통해서도 유일신이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찬양의 기도는 크게 세 가지 중심 구분(Three benediktion)으로 되어있다.

  '당신은 찬양받으실 주 우리 하나님 그리고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크고 강하시며 두려운 하나님, 지존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 우리의 방패이시며 우리 선조들의 보호자, 모든 종족 가운데서 우리의 신뢰 자가 되십니다. 아브라함의 보호자가 되신 당신은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1 benediktion). 당신은 용사이십니다.. 높은 자와 강한 자를 낮추시고, 권력자를 심판하시며 영원히 살아 계셔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며, 바람을 불게 하시고 이슬을 내리게 하시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한 순간에도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십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주님, 당신은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2 benediktion). 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두려우며 당신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주 거룩하신 하나님, 당신은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3 beneiktion)'.

유대교 속에서 그들이 간직한 신관은 부도덕과 비인격적인 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사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에는 어떠한 현실성도 없으며 모든 것은 마귀의 장난으로 보았다(고전 8:4, 10:20, 9:20-21). 오직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신이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이 낭독될 때는 야훼대신에 라고 불렀다. 이토록 철저한 신관을 가진 유대인의 종교 앞에서 이방인들이 간직한 신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회당에 가입하여 참되시고 인격적이신 전능하신 유일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들 모두는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간시대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종교생활 속에 나타난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마침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이(God-fearers)" 되었고, 후일 바울이 증거 한 메시아 사상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해 주었다.

3. 성경번역(LXX)

70인 역은 구약을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한다. 70인 역 중에서 모세오경은 가장 잘 번역되었다. 70인 역본의 관용구들은 히브리적 사고를 나타내고 있으며, 또 많은 구절들이 번역이 아닌 음역(transliteration)을 나타낸다. 70인 역의 연대는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전 250년 에서 1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럼 왜 “70”인 역이라고 하였느냐는 명칭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출애굽기 24:1-9의 이스라엘 70인 장로 때문이고, 둘째는 산헤드린 공회원 수가 70인이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예수님이 70인의 사도를 파송하였다는데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에 관해서는 쉽게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6 사람씩 선발이 되어서 고요한 밧모 섬에 머물면서 72일 동안 번역을 하였고, 유대인을 소집하여 확인한 후 검토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16세기 이후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서 거부되기도 하지만 성경번역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을 볼 때에 참으로 적절한 시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특별한 책이다. 성경의 거룩함 때문에 성경을 다룰 때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만약 성경이 낡아서 예배에 사용할 수 없을 때에도 그냥 버릴 수 없으며, 특정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른 사본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매장하였다.. 그들의 의식 가운데는 성경에는 얼마간의 절박한 신성(神性)이 있어서 거기에 손을 댄 사람은 누구나 의식적인 세수를 하여야 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벗어나서 삶의 규범을 설정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없다. 이토록 절대적 권위의 상징인 성경이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에서 지중해의 이방인들과 함께 공유되는 헬라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어쩌면 유대인의 특수주의를 기본적으로 헐어 버리는 크나큰 변혁일 수 도 있었다.

그러면 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가? 사실 유대인들은 수세기에 걸친 타국 생활 동안에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점차 잊어가게 되었다. 비록 그들이 회당을 통해서 히브리 언어와 문화, 그리고 성경의 낭독을 통해서 교육한다고 하지만 점차 모국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당시의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언어인 헬라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은 말하기를 만약 이 당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많은 헬라인들이 회당에 출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교 커뮤니 케이션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얼마나 긴요한가에 대해서는 필자의 언급이 필요 없으리라 믿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잇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10:18)”라고 선포하였다..

4. 유대교의 분파들

유대인들이 B.C. 538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다음에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이 유대인들 사이에 나타났다. 첫째는 대제사장이 유대 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심지어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관심은 율법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고 결국 계급주의로 빠져 버렸다. 둘째는 서기관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율법의 보존과 계발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가운데 유대교 내에서 몇 가지 분파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쿰란 종파 및 여십니다 이다. 필자는 다양한 분파 가운데에서도 사도 바울과 밀접하게 관련된 바리새파에 대해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바리새주의(Phariseeism)는 중간시대의 산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원에 대해서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스나이드(Snaith)는 말하기를 비록 그들이 갖는 어떤 차이점들은 초기의 포로기에서 기원한다 할지라도 이 모든 종파들은 주로 구약시대의 마감과 신약시대의 시대의 시작이 가져다준 산물이었다”라고” 말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 쉼(Peruschim)에서(Peruschim) 유래하였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그들은 모임 공동체 스스로 거룩한 집단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따라서 속되고 불결한 모든 것을 피하며 철저히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바리새주의가 발전하게 된 배경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고 레이몬드 설 버그는 말했다.

첫째는 철저한 율법주의의 강조에서 비롯되었다. 바벨론 포로시대에서는 토라(the religion of the Torah)의 연구를 집중함으로써 회당에서는 율법의 공부가 강조되었다.. 포로 이후에는 성전에서의 제의적(祭儀的)인 관심과 십일조의 계명을 아주 엄격히 지킬 것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들의 공동체 생활 가운데 율법의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식사도 공동으로 하기도 하고, 물건을 살 때도 동료에게만 구입함으로써 그 물건이 규정에 따라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국가주의(Nationalism)의 요인이었다.. 이는 그들이 포로가 됨으로써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그들의 동질성을 고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하시딤의 발현이었다.. 포로 된 지역과 팔레스틴 지역에는 다수의 그리스인들이 살았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는 많은 유대인들을 유혹하였고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들은 찬란한 헬라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갔다.. 그들이 동화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의 생활방식과 예절, 어투를 사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의 길을 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하시딤이 출현하여 유대인의 헬라화를 철저히 막았다.

이상과 같은 요인들은 유대인의 모든 계층에서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교회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바리새인들의 숫자는 대략 6,0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숫자는 전체 유대인의 인구수 에 비하여 크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집단화되고 종 교화된 그들의 세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바리새주의와 바울과의 관계는 참으로 밀접하다. 그는 스스로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1:13)”고 말하기도 했다. 바울이 선교지에서 율법을 지킴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증거 하게 된 것도, 사실은 그 자신이 율법에는 흠이 없을 만큼 유대인의 유전을 지나치게 추종했던 바리새인의 삶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한계(7:24)가 그를 절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5. 종교생활의 감화

유대교는 율법에 철저히 지켜야 구원을 얻은 종교이다. 안식일의 히브리어는 (sabbath)는 동사 (sabath)의 명사형으로서 중지, 휴지, 전지, 휴식, 안식을 뜻한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 까지를 말한다. 즉 한 주의 마지막 날로 그 기본형식은 어떤 일을 중지하는 것이다(34:21; 20:8-11; 8:5; 17:9-27; 13:15-2). 안식일은 쉼의 날(23:12)이며, 유대인의 집에 유하는 객과 남. 여 종들도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20:8-11). 모든 일 을 쉬는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데 모든 정성을 다했다. 이러한 안식일 법은 계약 법전과,, 신명기 법전(5:12-15), 그리고 성결 법전(19:3; 23:1-3)에도 철저히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은 유대교의 중심 신앙 규범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생활 속에서 신(神) 의식(神)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안식일은 구분하여 성심을 다해 지켜졌고, 이방인들이 생활하는 종교적인 관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율법을 지키는 삶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부도덕한 삶을 살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이방 세계에는 잡신을 숭배하고 유아 살해를 통해 제물을 바치고 혼음을 통해서 부도덕과 우상숭배가 만연 하였다.

이에 반하여 유대인들의 삶은 유대교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가정생활은 모법 적이었고 부부와 부자 그리고 모자간에는 율법의 엄격한 교훈들이 적용되었다.. 가장들은 가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으며 남자아이들은13세 때에 율법의 아들이 되었다. 특히 십계명 속에 있는 간음죄는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러한 종교적인 삶이 이방인들의 눈에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종과 함께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은 고상한 생활 속에서 변화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중간 시대 속에 있었던 유대인의 선교적 역할들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선교의 도구로서 유대인들은 선택받았지만 그동안 특수주의(Particularism)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는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중간기를 통해서 디아스포라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에게 증거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선교의 섭리를 알 수 있다. 참으로 하나님은 지혜와 모사에 능하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