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생애

2020. 5. 19. 09:51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의 생애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필자는 2006년 여름에 다소를 방문하여 바울이 태어나기 40년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둔 문을 보았고, 바울의 집터에 있는 우물도 관람하였다. 특히 바울의 집터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었다. 헬라문화 속에서 공원에 모여서 토론하고 사유했던 다소인 들을 보면서 자란 바울은 논리적인 사고들을 어려서부터 갖추었을 것으로 보였다. 사도 바울은 누구인가? 길버트 머레이는 말하기를 사도 바울은 확실히 헬라 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위대한 헬라 주의자인 올리히 폰 윌라모 윗츠 뫼렌도르프는 말하기를 사도 바울의 작품을 헬라 문학의 고전의로 묘사하였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바울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보다도 그가 남긴 가장 큰 족적(足跡)은 초대교회 선교사로서의 발걸음과 오늘날 성경이 된 서신서들이라고 해도 틀인 말은 아니다. 이번 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생애와 그의 선교 사역 그리고 그가 사도행전을 통해 남긴 선교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고대사(古代史)의 정확도가 사료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부정확한 경우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을 먼저 인식하고 다음은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서 사도 바울의 생애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출생 년대를 정확히 언급한 문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김연태는 그가 세례 요한이나 예수와 동시대에 출생하였다.”고했으며, 또한 브루스(F.F. Bruce)도 말하기를 바울의 출생은 서력기원(B.C)이 시작 된지 첫 10년이 경과되기 전에 출생하였다”라고” 말했다. 신성종은 그가 주후 11년경 봄에 태어났다고 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에 사도 바울은 A.D 10년 전후로 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상황들은 지중해 연안은 헬레니즘으로 인해서 급속한 변화와 확장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신적 혼합문화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 혼합적 문화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들에게도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이와 같은 다신(多神) 문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회당 제도를 발전시켜서 자민족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는 유일신관(唯一神觀)과 배타적(排他的) 문화관으로 밀려드는 헬라 문화를 방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시간이기 했다.

  그의 출생지는 작은 성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에서 베냐민 지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3:5, 21:39; 22:3). 제롬은 그 양친이 처음에 기쉬아리(Gischala)라고 불리는 갈릴리의 한 마을에서 이주해 왔으며 기원전 제11 세기에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지배할 때에 이곳 다소로 피난을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다소의 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의 헬레니즘을 가진 교육 도시로서 지리적으로는 무역이 융성한 번영의 도시였다.

  특이한 것은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던 로마의 엄격한 법률에 의하면 로마의 시민권(Ciliates)은 다른 모든 시민보다 우월한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있다. 브루스는 이러한 우월한 지위의 로마 시민권은바울의 부친(혹은 조부나 증조부)이 로마에 어떤 탁월한 공헌을 하였을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로마의 시민권은 사도 바울이 선교사역 중에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용이하게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16:37; 22:26). 로마 시민이면 로마 지역의 어디에서나 로마법에 명시된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그토록 로마 역내를 휩쓸고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시민권으로 인한 안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비록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생활을 했지만 자신은 철저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3:5) 의로 자처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연태는 주장하기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바울 측과 예루살렘 측을 연결 지으려는 의도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도 바울이 지닌 유대 적인 유산을 소홀히 할 수가 있다. 빌립보서 3:5에 바울이 자신의 신분을 설명한 경우를 보면, 그 자신이 유대인 중에서도 어떤 유대인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유대 법에는 남자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에는 율법의 전통을 공부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소년 바울은 그와 같은 교육과정 속에서 회당을 통하여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을 익히며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대에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하였다. 비록 불투만 같은 신학자는 갈 1:22를 들어서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교의 유명한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문하에 입문하게 된 것은 틀림이 없다. 단지 그가 언제 입문을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의 예루살렘 기거 설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첫번째 가설은 당시 관습인 13세 때에 베풀어지는 의식인 계명의 아들  (bar mitzvah)이 된 직후에 장래가 촉망된 아이들을 선발하여 유능한 교사 밑에 수학 하는 율법 학교 (rabbinic schools)에 입학 하게 하는 경우 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바울이 시집간 누나를 따라서 예루살렘에(23:16) 오게 된 계기를 통해서였다고 말한 경우도 있다. 세 번째의 가설은 바울이 어린 시절에 가족 전체가 예루살렘으로 이주를 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6:4). 아무튼 바울이 가말리엘 I(22:3) 문하에서 수학할 수 있다는 것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로 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열등한 체격을 가진 사람 (14:12)이었다.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요청(4:13-15, 고후 12:7-10)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독신자로서 평생 혼자 살면서 선교를 감당하였다. 혹자는 그가 공의회 최고 회원(행 26:10) 26:10)이었다면 독신일 수가 없으며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어야 한다고 하는 반문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평생 독신자(고전 7:8)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심 전의 바울은 교회의 박해자였다(행(행 7;58-8:3; 9:1,2, 고전 15:9, 3:6). 바울의 기독교 박해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혹자는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의 적극적인 행동이 가말리엘 II 세와 같은 관대한 스승의 가르침에는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이 현실을 보는 정도는 심각했다. 이는 유대교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바울은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의 스데반의 설교는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관해서였다.. 전통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에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자(21:23)였다. 십자가 사형 틀에서 죽은 자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었다. 엄격히 말해서 스데반의 메시지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신성모독죄이었다. 따라서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을 박해하는 행동이 더욱더 유대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지지를 받았을 법하다(민수기 25:1-5). 바울은 이러한 박해의 행동을 감행하면서 아마도 약 2세기 전에 자민족 안에서 배교를 근절하려고 행동했던 마타디아스(Mattathias), 하시딤(Hasidim)의 활동(마카비 12:23-28,42-48)이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1:13-14을 통해서 회심 전의 심경을 피력함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바울은 기독교인을 율법을 버린 배교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ἐπορθουν)” 목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다. 둘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로 간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술(前述)전술한 바와 같이 메시아가 어떻게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느냐 하는 유대교의 성경관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의 유대교와 조상의 유전에 대한 엄격성이 그를 심한 박해자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다. 바울의 회심은 공교롭게도 그가 교회를 파괴하고 예수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압송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갔던 다메섹 도상에서였다.. 시기는 AD. 32 경에 이루어진 일로 볼 수 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존속해온 도시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아브라함에 관한 성경 이야기(14:15; 15:2)에서 언급되고 있다. 헬라 적인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곳을 통치하였던 것으로 되어있다. 바울 당시의 다메섹은 셀레우키아 제국 속에 있었으며 광범위하게 헬라화 되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66년경에는 다메섹에 10,000-18,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바울의 신학은 다메섹에서 시작되었다.

 바울의 제자인 누가는 그의 회심에 대하여 각각 세 가지의 다른 형태 (9:4; 22:7; 26:16) 로 쓰고 있다. 그러함에도 누가는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스데반의 순교 신도들의 박해를 바울의 회심과 연결시킨다. 결국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넘치는 광채에 눈이 먼 채로 그 지방에 기거하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하나인 아나니아의 영접을 받음으로써 그의 회심을 통한 기독교인의 삶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정말 다메섹 사건은 바울에게는 그의 생애와 사상에 있어서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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