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1 차 선교 여행

2020. 5. 21. 19:11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의 차 선교 여행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세 차례의 선교여행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비록 죄수의 몸이기는 하지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1 차 선교여행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가 한 팀이 되어 선교사역을 감당한 사건은 사도 행전13:4절부터 14:28절까지에 나타나 있다. 선교지역은 구부로 섬의 살람미와 바보, 갈라디아의 안디옥, 루스드라, 더베 이다. 이는 당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지역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대략 AD 47에서 48년으로 잡는다.

  바나바와 바울은 기근으로 인하여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맡긴 후(11:27-30),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12:12) 바나바의 생질(4:10)인 요한 마가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요한 마가는 1차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의 힘이 약화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에서 큰일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사역도 중심 무대에서 사라져 감을 알 수 있다. 대신 안디옥교회는 이제 바울의 선교를 위한 사역지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들의 역할 변화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선교의 분깃점일 수도 있다. 이제 복음은 유대땅 에서만 머물 수 없다. 드디어 복음이 세계로 확산될 시간이 되었다. 성령님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φορίσατε)”라고 명령한다. “구별하다(φορίζω)”라는 동사는 사울의 생애에 있어서 세 번 사용된다. 그의 출생 시(1:15), 회심 때에 복음을 위하여 구별(1:1)될 때에, 그리고 이곳(13:2)에서 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부르심이 있지만 이방인을 위한 바울과 바나바의 부르심은 기독교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들 일행이 첫 선교지로 선택하였던 구부로(Cyprus)섬 이었다. 이는 바나바의 고향(4:36)이었다. 당시의 선교 팀은 바나바가 지도자가 되어 선교를 담당하였다. 또한 요한 마가를 수종자로 선교 팀에 합류시켰다. 이 수종자(πηρέτην)는 새로운 개종자를 가르치고 세례(고전 1:14-17)를 주는 일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부로 섬의 살라미(13:5)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회당(13:5)에서 증거 하였다. 이 부분에서 누가는 한 단어인 “온(ὅλην)”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의 뜻은 그들이 구부로 섬을 몽땅 다 다녔다는 뜻이 아니라 섬 안의 유대인 사회를 두루 찾아다니며 각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누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살람미를 떠나 바보에 이르러 하나님의 능력을 그곳의 박수(μάγος) 엘루마 에게 나타내었다. 그 지방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으려 하자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인 박수 엘루마는 총독의 복음 수용을 훼방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여 바예수인 박수 엘루마를 꾸짖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바예수인 박수 엘루마는 로마 세계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무엇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대표하였다. 만약 기독교회가 로마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그 영향력을 파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 종교에 의해서 기독교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바울은 그를 참으로 호되게 꾸짖는다. ,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 한자요 마귀의 자식(υίέ;문자적 의로는 자식)이요 모든 의(righteousness)의 원수라고 호통을 친다. 이 사건 이후 바예수는 소경이 되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13:12). 이 사건은 오늘날 선교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능력 대결(power encounter)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바보를 떠나서 밤 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른 후 요한 마가는 저희들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다(13:13-14). 이 안디옥은 프리지아에 있었으나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불렸다. 이곳 역시 로마의 식민지 였으며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지로 택했다고 본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선교에 앞서서 우리는 두 가지의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하나는 지도력의 변화이다. 지금까지는 바나바가 팀장 이었었는데 기꺼이 그의 위치를 양도하는 모습 속에서 바나바의 위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요한 마가의 팀 이탈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수많은 이유와 학설들이 있다. 리처드 N. 롱게네커는 말하기를 바울은 바보에서 경험으로 그의 원래 사명인 이방인 구원의 논리적 해석을 보았다. 그러나 요한 마가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이방인 전도의 소식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교회에 미칠 결과를 염려한 것이 이탈의 원인으로 제공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를 토우 센트(Stanley D.Toussaint)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열거하였다.

  첫째는 마가는 지도자직의 변화를 깨달았을 것이다. 즉 바나바는 요한 마가의 삼촌이었다. 둘째는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마가와 같은 팔레스타인 유대인에게는 너무 심한 변화였다. 셋째는 그는 아마도 바울이 계획한 다소의 산맥을 넘어서 안디옥에 가려는 위험한 여정에 겁이 났을 것이다. 넷째는 바울이 버가에서 말라리아 같은 질병으로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비교적 내륙지방을 피하고 높은 고지로 올라가고자 했던 것이 누가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마가의 향수병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는 홀로 된 과부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정이 그를 되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요한 마가의 이탈은 다양한 이유들을 떠나서 사도 바울에게 깊고도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음을 볼 수 있다(15:38). 이곳 비시디아 안디옥 에서는 바울은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모인 독실한 유대인 개종자(devout converts to Judaism)에게 예수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시며 구세주라고 선포했다(13:14-43). 그 다음 안식일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에 흥미를 보이자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이 시기하여 복음에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시에서 선교를 계속하여 직접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나아갔으며 그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13:44-49).

  그러나 이러한 소식에 유대인들은 도시의 유력자를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고, 그들은 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그 도시를 떠난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서 전도자들은 이고니온(현재의 코냐,Konya)으로 갔다. 그곳은 동남동 쪽으로 약 150Km 가장 떨어진 곳이며, 현재에는 중요한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요지이다. 이고니온의 선교(14:1-7)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선교 역사를 확인시켜주는 결과로써 바울과 바나바의 회당에서의 설교 후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πιστεσαι)” 라고 누가가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누가의 이런 기록도 사건에 대한 설명이 모호하다고 하며 본문이 정확하다고 믿기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되며 여러 자료를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비록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더 확실한 보증이 선교사역 속에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역의 결과에도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루스드라와 더베로 몸을 피해 도망을 하였다.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정확한 기록은 이고니온도 루가오니아의 도시였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주로 브리기 아인들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단순히 핍박을 피하려고 이고니온을 빠져 나오지는 않았다. 루스드라와 더베및 그 근방으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하니라(κκεεαγγελιζόμενοι ἧσαν)” ἧσαν)”라는 말의 구조는 계속된 행위의 연속이 됨으로 사도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적인 복음 증거의 행위를 나타내 주는 말이라 하겠다.

  루스드라 에서의 사역(14:7-20)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바울이 고치는 사역이 소개된다. 이는 그가 진정한 무능력이 강조되고 진실로 앉은뱅이였다는 것이 삼박자의 리듬의 기법으로 설명하며 강조되고 있다. 저자 누가는 이점에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구걸하기 위하여 앉아 있는 체하는 것이 아니고 나면서부터 그의 성장 과정이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베드로와 동등한 위치의 사도임이 증명되는 놀라운 사건이다. 사도행전 속에서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은 세 번 나온다(3:1-10; 9:33-35; 14:8). 로마의 식민지인 루스드라는 희망이 없는 앉은뱅이의 고향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는 이토록 희망이 없는 앉은뱅이를 치료함으로써 이들에게 복음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치유의 능력을 본 사람들은 바나바는 쓰스(Δία: Zeus) 신이라고 하고 바울은 허매(ʿΕρμήν:(ʿΕρμήν Hermes) 신으로 호칭을 하면서 숭배하려 들었다. 쓰스와 허메신에 관하여는 리처드 N. 롱게네커 가 그의 책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Metamorphoses VIII), 쓰스와 허메가 한 번은 숙소를 구하려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1천 가정의 문을 두드렸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마침내 보잘것없는 초라한 늙은 가정인 부부 빌레몬(Philemon)과 바우시 (Baucis)가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들 부부는 정성껏 그 신들을 대접하였다... 감사한 마음에 그 신들은 그들의 작은 오두막집을, 금 지붕과 대리석 기둥으로 된 신전으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또한 두 부부를 신전의 제사장으로 임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죽을 때에는 참나무와 참 피나무로 변했다. 그러나 환영해 주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복수로 그들의 집을 모두 파괴하여 버렸다.

  주민들의 신적 호칭에 두 사도는 옷을 찢으면서 참된 신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설교하였음을 볼 수 있다(14:15-18). 결국 루스드라 에서의 선교는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거절하였던 것이 그들의 분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에서와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에 의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생한 소동에서 바울은 심하게 얻어맞았음을 볼 수 있다(14:19-20). 그는 죽은 줄로 알고 내버림을 당했다(14:19). 그러나 개심자들이 바울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자 하려고 모여들었다. 그들에 의하여 의식을 되찾고 성으로 들어가서 치료를 하고 그다음 날 그곳을 떠나서 더베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신체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대단히 강인하였고 이내 원기를 회복하는 속도가 빠른 체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후일 말하기를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다(고후 4:9)”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약 100Km1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써 소아시아의 도시들 가운데에서 가장 먼 동쪽의 도시이다. 이 곳 에서의 복음 증거는 성공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14:21). 복음은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많은 사람을 설복시켜 제자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그동안 사역을 하여 제자들을 세웠던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안전하게 안디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성읍의 관원들이 새 얼굴로 바뀌었으므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고 람세이(William M. Ramcey)는 말했다. 두 사도들은 최근에 그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소아시아를 되돌아 왔음을 알 수 있다. 권면과 약속으로,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15:32,41) 용기를 주었다. 권면의 내용은 많은 고난에 대한 예언이었고,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 대한 기대였다. 또한 각 교회에서 장로들(πρεσβυτέρους)을 택하여...(14:23)”라고 한 누가의 기록을 볼 때에, 신자들은 이러한 권면과 약속 외에도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도 지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수리아 안디옥에 돌아와서 그들은 사역 보고를 하면서 말하기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14:27)”라고 사역을 보고하고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려 볼 수 있다. 첫째는 복음이 이미 이방인에게 들어갔음을 말해준다. 둘째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을 헐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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