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제 2 차 선교여행

2020. 5. 25. 16:51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의 제2 차 선교여행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지리적 진전은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에서 나타난다. 사역 초기에는 소아시아의 범위 내에서 1차 선교 여행지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이방인 선교를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와 남부 유럽 지방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따라서 오늘날 유럽지역이 집중적인 선교대상 지역이었다. 즉 마케도니아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가야의 아테네 그리고 고린도 지역이다. 제2 차 선교 여행은 사도행전 15장 36절에서부터 18장 22절에 나와 있는데, 이 시기는 대강 주후 49년에서 52년 사이로 잡는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의하기를 이전에 선교 여행을 통하여 함께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방문하고자 했을 때 사도 바나바도 긍정적인 반응을 가졌다(행 15:36).  그러나 요한 마가의 합류 의견 때문에 심한 다툼(παροξυσμός; 성가신, 선동적인, 자극하는)으로 말미암아 피차 갈라지게 된다. 즉 바나바는 여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게 되었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의 선교지역으로 떠나게 되었다(행 15:36-40). 비록 그들은 사역을 위하여 나뉘었지만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요한 마가를 동시에 훌륭한 주의 일꾼으로 여기고 있었고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었다(고전 9:6, 딤후 4:11). 분명히 최고의 서열에 있는 신앙인이라도 의견을 달리하여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러나 그들이 개인적인 중상모략이나 변명을 취하는 일이 없을 때 성경은 어느 편도 오명을 씌우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쉬운 것은 여기에서부터 바나바의 선교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매우 후대의 저작인 외경(Periodoi Barnaboe)에 기록되어 있는 전통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브로에 머물렀다고 적혀 있다.
  바울은 이제 새로운 선교 팀의 동반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울이 실라를 선택하게 된 것은 그가 특별히 선교 사업에 적합하다는 데서 기인되었다.  이에 대하여 토우센트(Stanley D.Toussain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이 실라를 택함은 현명한 처사였다. 첫째는 그는 예루살렘의 회의의 판결문을 안디옥에 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한 공식 대표였다(행 15:22). 둘째는 그는 로마 시민이었다(행 16:37). 셋째는 그는 선지자였다(행 15:32). 넷째는 안디옥 교회는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둘 다 주의 은혜를 위하여 형제의 부탁을 받았다. 다섯째는 실라는 바울의 서기관으로 봉사했으므로 미루어보아서 헬라어에 능통하였다고 볼 수 있다(벧전 5:12).  결국 바울과 실라와의 만남은 교회들을 굳게 하는 사역 이 되었다

  실라가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은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바울에게 무척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다.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여러 친구들과 회심자 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한 젊은이인 디모데와 친분이 맺어지게 된다. 그 젊은이의 생은 이후로 바울의 생애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게 된다.  디모데를 징병하면서 바울은 그에게 할례를 행하게 만든다. 디모데는 어머니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적 신앙으로 양육되었고 아버지는 헬라인 이었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 이 할례의 행함은 갈라디아서 2:3-5에 나타난 바울의 생각과는 불일치를 이룬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른 경우를 볼 수 있다. 즉, 갈라디아서에서의 상황은 할례가 의로움을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거슬림을 주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고전 9:19-23). 물론 예루살렘 회의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가 필요 없다고 이미 판시하였다(행 15:10-11,19.)  
  사도 바울은 그가 의도하였던  여행 여정인 속주 갈라디아의 부르기아 지방을 통과하는 여로를 계속 밟아 나갔다. 각 성읍에서 바울과 실라는 규례를 전했고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유대교의 의식 중 요긴한 것을 준수하라고 권면했다. 앞서의 1차 선교 여행에서 그는 그 지방에서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 두 성읍을 방문하였었다. 그 성읍들에서는 아무런 충격적이고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저자는 특별히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선교단이 처음 계획을 세웠던 것은 우선 에베소가 주도하는 아시아 서부 지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 전역을 다녔다(행 18:23).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허락지 않으시고 유럽으로의 방향을 잡도록 인도하셨다(행 16:6-8). 여기에서 세 차례에 걸친 서로 다른 기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성령(행 16:6,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과,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행 16:7, ούκ εἲασεν αὐτοὺς τὸ πνεύμα ʾΙησού)와  밤에 환상(행 16:9, ὅραμα)이 각각 나타났다. 이에 대한 몇 가지 해석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토우 센트(Stanley D. Toussaint)는 그것은 아마 환경이나, 예언, 환상, 혹은 다른 현상으로 나타났으리라고 말했다.  블루스(F.F Bruce)는 이전 번(행 16:6)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과는 다른 미묘한 차이 때문에 이는 경고(행 16:7)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람세니(William M. Ramsay)는 이에 관한 해답을 바울이 그의 사역지를 선택하기가 어려운 시점에서 드로아에서의 환상(행 16:9-10)으로 말미암아 안개가 겉힌것 처럼 여행의 목적이 밝혀졌다고 말하였다. 결국 저자 누가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새겨 놓음으로 저자가 이것을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드로아에서의 결정은 참으로 중대한 선교의 방향 설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복음이 아시아 지역을 넘어서 유럽에 확산되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순간에 성령님이 간섭하시고 지시하심이 당연한 결과로 여겨진다.
  저자 누가는 드로아에서부터 바울일행과 합류(행 16:10) 하고 빌립보의 길을 안내하였음이 분명하다. 누가는 의사였고 빌립보는 의학의 본고향이었다.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가는 길의 지도상을 살펴볼 때 누가가 빌립보인 이라는 사실은 더욱 강해진다.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 모드 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다시 배를 이용해 빌립보에 이르렀다(행 16:11-12). 이러한 계획은 바울의 복음 선교 사상과 우연히 일치한다. 그의 승리적인 복음 선교의 비전은 전체 로마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즉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스페인까지 로마 황제의 권력 하에서 하나로 묶인 전체 국가를 보았다. 넓은 로마 천지를 선교함으로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롬 15:24,28). 빌립보는 B.C. 356년에 일찍이 크레니데스(fountains)인들이 정착했던 자리에 그 성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Philip-II,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의 이름을 딴 성이었다.  이 성은 B.C. 42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때의 빌립보 성 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아직 자리 잡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이렇다 할 유대인 인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법에는 어디에서나 열 가정이 모이면 율법의 학습을 위한 회당이 건립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족수 열 가정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회당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의 바울의 선교 팀은 세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여 복음을 증거 하게 된다. 첫째는 상인이면서 중산층인 자주 장사 루디아 이다(행 16:14-15). 비록 회당은 없었지만 성문 밖 갠치츠(Gangites) 강가에는 많은 여인들(특히 하나님을 공경하는)이 모이는 비공식 예배 처소가 있었다.  네 전도자들은 그들이 도착한 바로 그 주의 안식일 날 아침에 그 장소를 찾았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물감 포목 장사인 경건한 루디아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녀의 가정에 세례를 베풀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의 집이 빌립보 성의 선교 기지가 됨을 알 수 있다. 둘째는  하류층의 복음 수용자인 귀신 들린 여종(πνεύμα πύθωνα; 큰 뱀의 영)을 고쳤다(행 16:15-18). 여기에서의 귀신이란 복화술사(腹話術師)로서 이는 초인간적인 영향력에 기인하여 장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함축한다는 생각은 보편적으로 받아 드려 졌다. 이 여종이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행 16:17) 소리를 지르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손상을 입었다.  이 여인을 고침으로 인하여 수입을 잃게 된 주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사회 소란 죄를 뒤집어쓴 채로 투옥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감옥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찬송은 아마도 간수들은 물론 다른 죄수들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셋째는 중산층인 간수를 만나서 그 집안 모두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다(행 16:22-34). 감옥 속에 있는 그들에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행 16:26). 이 초자연적인 현상은 베드로의 경험(행 5:18-20; 12:3-11)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별한 경험이었다.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알고 책임을 맡은 간수가 자결하려 할 때 바울은 그를 안심시킨 후 주의 복음을 그 가정에 심었다.
  이튿날 바울 일행은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행 16:37). 왜 바울은 그의 시민권 사용을 지체하였는가?. 그것은 심문 장소에서의 소란(행 16:19-22) 때문에 의사 전달이 되지못했을 수도 있고 적당한 시간이 되기까지 의도적으로 지체하였는지 모른다.  로마의 시민권을 제출한 후 빌립보 관원들은 긴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로마의 시민을 구타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상관들의 요청으로 빌립보 성을 떠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람세이(William M. Ramsey)는 베자 사본의 예를 들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질서를 유지할 능력에 대하여 스스로 불신하여 상관들이 권하여 가로되 “또 다시 소동이 일어나 우리에게 큰 소리로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이 성을 떠나가라”라고 하였다고 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남으로 우리(We) 부분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누가는 계속 빌립보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의 실제적인 거리는 약 160Km로서 그들은 암비볼리를 경유 하여, 아볼로니아(행 17:1)를 거쳐서 도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두 도시를 지나쳤던 것은 아마도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는 정치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주전 168년에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14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영웅 시저(Caesar)가 암살되고 로마가 내전 상태에 빠졌을 때에 데살로니가는 시저의 양자 옥타비우스(Octavius) 편에 가담한 공로로 BC 42년에 자유 도시가 되어 지방 차치 제는 물론 군대를 소유하고 세금을 거두어 드림으로서 AD 27년도에 재편된 마케도니아 지방 총독의 거주지로 남게 되었다.  종교적인 면에서 로마의 영향을 받아서 황제 숭배 사상을 강요함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 화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인 현상은 유대인들이 읍장들 앞에 가서 바울 일행을 고소하면서 “...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행 17:7)”라는 말속에서 정치적인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바울 일행이 고소당한 종교적 상황은 당시에 헬라 세계에 흩어져 있었던 다양한 종교적 사상들, 즉 거듭남, 불멸성, 죄의 용서, 또는 성적인 만족 등에 관한 이슈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선교(행 17:1-9)도 역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음을 수용하는 계층들은 다양한 계층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데살로니가의 선교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개종되어지는 선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 1:9에 의하면,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다수의 비 유대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계층들은 복음을 접한 다수의 무리와,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 적지 않는 귀부인 등으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 경건한 귀부인들이 이곳에 언급된 것은 당시에 데살로니가는 고린도 지역보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자유스럽게 활동하고 있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귀부인들에 대한 복음 전도는 지배계층인 남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아내들이 새로운 종교 속에 최면이 걸린 것 같은 착각을 갖게도 할 만하였다.  
바울 일행의 선교의 결과 가장 심하게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은 회당을 이끌어간 유대 지도자들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지 방 유지들이 회당의 공동체 모임에 참석치 않게 되자 저들은 지극히 분노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저들은 시장터에서 어슬렁거리는 폭도들을 동원하여 방문자들을 3주 동안 대접하고 있는 야손(Jason)과 몇몇 다른 회심 자들에게 분풀이를 한 모습을 본다.
  읍장(πολιάρχας) 앞에서 바울일행이 탄핵을 받게 되므로 데살로니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돼 었다. 읍장들에 의하여 내려진 결정은 그 상항 가운데에서도 사려 분별이 있는 가장 부드러운 조치였다. 즉 바울 일행을 데살로니가를 벗어나게 하는 대신에 참소된 자들에게서 더 이상 소란 없이 평온을 유지한다는 담보를 받았다. 짧은 체류 기간 동안에도 그렇게 많은 결실과 열심인 선교의 교두보를 뒤로한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실이었음이 분명하였다. 아픈 마음을 후일 그의 서신을 통해서 말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 2:17-18). 결국 무엇이 사도바울이 다시 한번 데살로니가로 가지 못 하게 한 원인을 사탄(ὁ σατανάς)이라고 보았다. 이는 분개한 군중들도 아니요, 유대인들도 아니며, 바로 데살로니가의 관리였다.
  베뢰아는 산지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데살로니가로 부터 남서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다.  시세로(Cicero)는 베뢰아를 “본토에서 벗어난 작은 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베뢰아의 선교(행 17:10-15)는 바울 일행이 항상 그렇게 하였듯이 회당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므로 시작된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의 복음 증거를 열심히 경청(행 17:12) 하였고 편견을 갖지 않았다. 다수의 남자들은 물론 헬라인의 귀부인들도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복음 증거의 장막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서 원정 온 무리들 때문이었다. 급기야 바울은 베뢰아를 떠나서 아덴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교회의 성장을 도왔다. 왜 사도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아덴에 도착하자 말자 그들을 하루속히 합류하도록 명령을 내렸는가.  다소 모순된 듯 한 이 상항 속에서 바울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 람세이( William M. Ramsay)는 말한다.  
    
  사도행전과 데살로니가서를 비교하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돌아가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고 그의 길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는 낭보를 기대했다. 실라와 디모데는 그 소식을 전해 받아서 바울에게 전하기 위하여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아덴으로 갈 때에 배로 갔는지 육지로 갔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 명의 형제들이 그와 동행하여 안전하게 아덴에 도착하게 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바울이 수개월간 베뢰아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헬레니즘 세계에 있는 어떠한 도시도 여러 양상들에 있어 헬라인들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 하였던 아덴(현재 아테네)과 견주어질 수 없었다. 아덴의 유명한 건물 중 많은 것들이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cles, B.C. 461-429) 때에 건축되었다. 비록 B.C 146년에 로마가 헬라를 정복하였지만 로마제국 역시 이 도시의 과거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제국에 속한 자유로운 동맹 시로서 아덴 나름 데로의 여러 제도와 기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따라서 철학에 있어서도 아덴은 스토아 사상의 본산지로서 로마 말기의 뜻있는 사람들의 생활 이념이 되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와 풀라톤의 고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 큐로스와 제논에게는 철학의 활동 무대였다. 
  아덴에서의 선교(행 17:16-34)는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ἑκδεχομένου; while Paul awaited them)" 동안에 이루어진다. 이 기다리는 기간을 6주를 초과할 수 없었고, 아마도 4주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 하면 아마도 2주일이 못되어 그의 절박한 명령에 따라서 실라와 디모데가 그의 기다리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한 체 도착하였기 때문이다(살전 3:1).
  바울의 학문성과 비범성은 그가 아덴의 거리를 배회하는 동안에 각종 유적과 학당에 대한 관심은 곧 성읍전체에 들끓 고 있는 우상들에 의하여 격발 된 의분으로 압도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변론하다가 만난 사람 가운데 첫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Epicurean and Stoic) 철학자들이었다. 토론이 진지하여지면서 바울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체포되어서 아레오바고(공의회) 앞으로 끌려갔다. 철학자들 간에는 사도 바울에게 손을 대기에 앞서서 호기심과 함께 경멸하기 위하여 그를 공의회 뜰에 세웠다. 바울의 논조(論調)는 그가 설교했던 사도행전 13장과는 다른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을 완벽하게 설파하는 모습을 본다(행 17:22-31).
  논쟁의 결과 소수의 몇 사람만이 바울과 친하여 교제를 갖고 믿게 되었다(행 17:34). 아덴에서의 바울 선교는 실패하였다 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선교엔 실패는 없다. 다만 헛된 속임수의 철학(골 2:8)이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함으로 복음의 문을 그들 스스로 닫아 버림이 문제일 수 있다. 아덴과 고린도의 선교를 마친 바울이 “아가야에 첫 열매”라고 할 때에 그는 고린도에 있는 한 가족을 가르쳤었다(고전 16:15).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하나의 생명이다.
  어떠한 상항의 설명도 없이 바울은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이르렀다(행 18:1). 아덴과 고린도는 비록 거리상으로는 약 85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지역적 특성은 판이하게 달랐다.  아덴은 문화와 지식을 대표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고린도는 상업과 방탕으로 특징 지워지는 도시였다. 상업적인 유리한 덕택에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고대 헬라 시대에 큰 번영을 누렸다. 따라서 사치가 극대화되었다. 고린도(동사 κορινθιάξεσθαι: 고린도 인을 희롱하다)라는 이름은 성적 방종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도시는 또한 사랑의 여신이며 종교의 이름으로 부도덕을 촉진시킨 아프로디테를 예배하는 중심지이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이며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18개월 동안 사역을 하면서 고백하기를 “...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고전 2:3)” 복음을 증거 하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어떤 요인으로 인하여 심히 떨었는가. 토우 센트( Stanly D.Toussaint)는 “그는 혼자였고, 마게도니아 사건 이후 고린도에서 이러 날 일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방탕한 도시에서 오는 것들이 그를 긴장시켰다”라고 말하였다.
  이곳 고린도에서 바울은 업(장막을 만드는 일: σκηνοποιοί)이 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행 18:2). 이들 부부는 A.D 49년이나 50년 경에 글라우디오의 명에 의하여 본도에서 추방되어 내려와서 장막제조 사업을 하는 개종자였다(행 18:3). 실라와 디모데의 합류(행 18:5)로 말미암아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 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열매가 여러 회심 자들을 낳게 하였다. 즉 회당장 그리스보는 물론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게 되었다. 특히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은 많은 고린도인 들이 기독교화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결과들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회당 사용을 금했다. 따라서 회당 곁에 집을 가지고 있는 디도 유스도가 자기 집을 사용토록 내어 놓음으로 선교활동의 본부가 되었다.  
  갈리오는 세네카의 동생으로서 스페인 혈통의 로마 가문에 속한 자였다.  그가 A.D 51년 7월경에 아가야의 식민지 통치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재임하였다. 그 동안 불만 세력들이었던 유대인 공동체의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소하지만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하여 바울의 변론도 들어보지 않은 채 물러가도록 명령을 하였다(행 18:14). 사실 갈리오가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교리가 유대교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 지배 아래 합법적인 종교였다.
  수리아에로의 여행 차 고린도를 떠날 때 실라와 디모데는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남아 그곳의 교회들을 감독하였다. 전도대가 에베소까지 아굴라와 부리스 길라를 대동시켰다.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좀 더 교제하기를 원했지만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을 지켜야 되겠다는 바울의 스케줄로 인해서 그곳을 급히 떠나야만 하였다. 바울은 마침내 오랜 항해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선교의 결과들을 서로 나누고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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