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3 차 선교여행

2020. 5. 26. 09:43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의 3 차 선교여행

조귀삼 박사( 전 한세대 선교학 교수)

  사도바울의 3 차 선교 여행의 중심은 에베소이다. 3차 선교여행은 사도행전 18:23-21:16 18:23-21:16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기는 A.D 52년 늦여름부터 56년경까지로 추정된다. 사역 장소는 길리기아, 갈라디아, 에베소, 마케도니아 그리고 아가야이다. 그러나 중심 사역지는 에베소이다. 저자 누가는 3차 선교 여행의 첫 도입을 간결하게 처리하며 에베소의 사역을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가는 본격적인 바울의 에베소 선교에 앞서서 아볼로의 개종을 다룬다(18:24-19:7).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활동은 대략 A.D 52년 늦여름 에서 부터 2년여 동안 이루어 진 것을 알 수 있다. 카이스터(Cayster) 어귀에 위치해 있는 에베소는 크게 두 가지의 지역적인 특성이 있다고 리처드 N. 롱 게네커가 말했다. 첫째는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지리적 위치이다. 이는 아시아의 로마 성(province)의 도시들과 해외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 도시의 특성을 말한다. 둘째는 아데미의 숭상이었다. 신상 아데미 는 많은 유방을 가진 비옥한 모습 여신이다. 그녀의 신전은 세계의 7(wonders)의 하나 이다. 아데미 숭배는 기존에 살고 있던 가리인들과 그곳에 새롭게 정착되는 이오니아 주민들과 혼합되면서 그곳의 지방 신으로 섬기게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행한 첫번째 사역은 제자들(μαθητάσ: 예수님의 제자들)을 성경 안에서 바로 가르치는 일이었다(19:1-7). 이들 제자들은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다(3:2,6,8,11; 1:4-5; 3:8).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해 주었다. 그리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를 드러내게 하였다. 이것은 신약에서 재세례가 베풀어진 유일한 곳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선교행위는 복음적 해석에 있어서 바울의 영향력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두 번째 사역은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역이었다. 에베소 회당에서의 3개월 동안의 환대(19:8)로 인해 선교사역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일부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두란노 서원 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집회를 시작하였다. 서방역본 에 의하면 바울이 회중과 토론하는 시간은 제 5시 에서 제 10시 사이인데 이는 서구의 시간으로는 오전 11시 에서부터 오후 4시까지가 된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무더운 시간이다. 왜 바울은 그가 가장 무더운 시간대에 강론을 하였을까? 아마도 그는 아침과 저녁에는 천막을 제조하는 노동을 통하여 자급자족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고 강론 시간에 참석한 그들도 여가 시간을 활용케 함으로써 모이기를 용이하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사도 바울의 직업관에 대해서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천막제조를 주업(主業)으로 하고 평생을 살았는가? 아니면 복음 선교자로서 살아가는 과정 가운데 그가 어려서부터 익혔던 천막을 만드는 일이 사용되어졌는가? R.H. 호크는, 그의 책 바울 사역의 사회적 상황: 천막 제조와 사도성(The Social Context of Paul's Ministry: Tentmaking and Apostleship)에서 바울의 직업을 철저히 천막 제조자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 일수 있다. 비록 바울은 그가 행한 노동 가운데 분명히 천막을 제조하여 생계를 유지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교사역의 불균형적인 보급으로부터 오는 단기적인 수단이었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들의 직업관은 항상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생계유지 형 보조 수단의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란노서원에서 가르친 사역은 효과가 있어서 아시아에서 사는 자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기간 동안에 골로새, 라오디게아와 히에라 볼리에 교회가 세워짐을 알 수 있다(4:13).

  세 번째 사역은, 귀신과 마술의 축출을 들 수 있다(19:13-20). 사도행전의 주제 중의 하나는 마귀를 이기는 능력의 역사이다(8:9-24; 13:6-12; 16:16-18). 바울이 손으로 마귀를 축출할 때 사용한 물건인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각종의 환자와 악령이 들린 사람들에게 대면 효험이 즉시 나타났다(19:11-12). 이와 같은 사건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한 사람들의 믿음에 있었다. 이때에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유대인의 한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의 예를 들고 있다(19:14-16). 이 사건 이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크게 하나님을 두려워(φόβος: 경외심) 하였고, 자기들의 악행을 회중 앞에 죄를 고백하고 마술 서적을 불살라 버렸다.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은 에베소에서의 크나큰 소동으로 연결된다. 그 당시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상을 제조하여 사업을 하는 데메드리오가 바울이 말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통하여 영업이 안 되어 수입이 감소되자 바울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인하여 화가 난 은장 색들은 바울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바울 대신 잡아 가지고 당시 그 도시에서 가장 큰 원형 극장으로 달려갔다. 흥분한 군중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기 위하여 모였는지도 모르면서도 약 두 시간 동안이나 위대한 아데미(Great Artemis)”를 외쳤는데 이것은 그들의 기도문이다. 이다.

  마침내 대단히 놀란 서기장(γραμματες: 시의 행정 관원의 장)의 소란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생각보다 쉽게 조용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에베소에서 선교가 한층 반대만 일으킬 것으로 여겨지자 마게도니아로 떠나게 되었다(20:1).

  에베소에서의 선교 일정이 끝날 무렵에 누가는 사도 바울이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고” 말하면서 마게도니아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였다고 적고 있다(19:21). 바울이 그 무렵부터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운 것은 그의 서신서들에 의하여 세밀하게 쓰고 있다(고후 2:12-13; 7:5-7). 누가는 3차 선교 여행의 구분을 간략하게 처리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서술하는 계획의 종착지를 로마로 귀결시킴으로 로마의 역할을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아가야에서 3개월을 머물러 있으면서 로마서를 썼다(15:23-16:2). 그의 본래의 계획은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선상에서 그를 암살하려고 하므로 말미암아 마게도니아로 다녀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아마도 유월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바랐다(20:16). 그가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를 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세운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및 아가야의 모든 교회들이 헌금한 것을 섬김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도 있었다(15:25).

  3차 선교여행을 마치기 위하여 바울 일행은 드로아를 경유하는 동안 밤중까지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를 듣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의 기도로 살아난 사건이(20:8-10)이 교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그 후 밀레도를 통과하는데 그곳에서 멀지 않은 에베소에 기별하여 장로들을 모았다. 그리고 고별 설교를 하였다.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2-24)”라고 비장한 결심을 밝힌다. 바울의 이 설교는 소명을 받은 자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시역 고백이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들을 부탁하고(20:32)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신자들의 예루살렘 귀환의 반대와 빌립 집사의 딸들의 반대도 무릎 쓰고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된다. 이로써 사도 바울 일행의 3차 선교여행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