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선교의 관점에서 현대선교신학 평가

2020. 9. 18. 08:38선교학 강의

바울 선교의 관점에서 현대 선교신학 평가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세계다문화진흥원 원장)

  필자는 바울의 선교원리나 방법을 기준으로 하여 현대 선교신학의 평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기독교의 선교적 열량을 한데 모으고자 노력했던 선교지도자들의 결집된 기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선교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단순한 삶의 개선이냐? 아니면 영적 변화를 통해서 삶의 개선이 스스로 이루어져 나가는가? 바울 선교 와 현대 선교신학의 연결 고리는 여기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현상의 모든 제도를 뛰어넘는 궁극적인 실체이며 영원한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막 9:43)라고 하셨다. 이 세상의 물은 먹어도 먹어도 목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4:13-15).

  현대의 복음주의 선교는 이와 같은 말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선교 신학의 주요 교리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성경의 절대적인 영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의 증거에 있다고 인정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7:1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8: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사 1:2 등) 등으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가르쳐서 성경의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5:17-18)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모세 시대 이후부터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시대를 거쳐서 구약의 39권과 신약의 27권이 기록되었다. 비록 이토록 수없이 많은 변처닝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진리의 적용은 특정한 상황에 부합되어 분명히 변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진리 자체는 항상 동일한 것이며 남아 있는 법이다.

  둘째는, 영생에 관한 교리를 분명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실 사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20:3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사람들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영생)을 누리게 한느 것이었다(10:10). 요한 복음에서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는 "영생"(ξωη)36회나 사용되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이 영생은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때 경험하게 될 것이다(5:29). 래드(George Eldon Ladd)는 말하기를 "영생은 종말론적 축복이면서도 현재적 축복도 된다"라고" 하였다. 먼저 종말론적 축복에 대해서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히 두 세대 간의 분명한 구분과 아울러 종말론적인 축복으로써 영생을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미래적인 축복을 말씀하시면서 현재적으로 이와 같은 생명을 체험케 하심으로 축복이 되게 하신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영생은 에큐메니칼 주의자들이 말한 현재적 도래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는 비록 현재적인 축복을 믿음 안에서 누리고 있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를 살리게 됨으로 완성될 것이다(6:40, 54).

  셋째는, 인류의 타락과 구원의 교리이다. 위대한 신학자 칼빈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담의 범죄와 함께 인간은 철저히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범죄 한 인간 속에 남는 것은 절망과 비참함과 사망으로서 그것들은 항상 인간을 두르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3:23)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구제책을 마련하셨으며, 바로 그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살전 5:9).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3:13), "그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3:13), "그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8:32). 예수님 자신도 그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니라"(10:4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없이는 인류의 전적인 타락 속에 있는 죄를 해결할 수 없었다. 바울은 그의 선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류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다. 에큐메니칼 정신 속에 숨어있는 종교다원주의는 참된 선교 신학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죄없이 이 세상에 오셨다. 즉 남자 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이시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요셉이라도 그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었기 때문이다(눅(눅 1:18 ). 비록 그는 죄 없이 이 세상에 도성 인신 하셨지만 죄가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죄인의 형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인류를 위한 유일한 대속의 죽음이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인류에게 베푸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4:12).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모순은 선교 신학에 중차대한 문제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선교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기독교의 최후의 보루이며, 기어이 사수하여야 할 명제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을 한 사람 예수에게 맡기셨다고 말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2:8) 라고 말했다. 인류에게 다른 길은 없다. 다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된다. 십자가의 은혜란 오직 예수에게만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거룩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권위를 수평직으로 바꾸어 버렸다. 바울 선교에 있어서 교회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구약의 용법이었다. 그가 자주 사용한 교회 안에(νεκκλεσια)는 예배를 위해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말한다. , 특별한 집에서 가정 교회로 모인 신자들을 자칭할 수 있으며(16:5; 고전 16:19; 4:15; 2), 똔 그것은 한 지역에 사는 몯느 신자들을 지칭할 수 있다(16:1; 4:16; 1:22; 1:2). 바울은 선교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따라서 그의 전도 여행의 대부분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였다. 오늘날 선교의 주도권이 지역 교회(Local Church)냐 아니면 선교회(Para Church)냐 하는 문제가 종종 제기된다. 그러나 모든 종족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 속에 모든 교회의 힘이 모아져야 한다고 본다.

  여섯 번째, 종말론적인 선교 의식이다.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들 에게 최후의 날, 심판날,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말론적 사고 가운데에서 긴장 관계를 가지며 성도가 세계 복음화를 감당하여야 할 책임은 수없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마24:14).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나를 부인할 것이니라(10:32-33).

  성경은 분명히 창조의 태초가 있었던 것처럼 종말의 끝이 있다는 것을 수없이 많이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선교란 인류 종말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선포하고 가르쳐야 할 막중한 책임이 포함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 현대 교회의 주요 임무는 선교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수행해야 할 다양한 사명을 주셨다. 이러한 사명은 세상을 복음화시켜서 교회를 만들고, 만들어진 교회를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조직적인 교육을 통해서 세계선교에 동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복음주의 선교 신학의 임무는 구령 사역을 위한 총체적인 역할을 교회가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의 임무는 에큐메니칼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 개혁이 아니며, 경제를 향상하는 도구도 아니며, 정치를 바꾸는 작업도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그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킬 때, 그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그가 현존하는 사회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순위는 당연히 구령이 선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중추적인 기관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덟 번째, 범사에 있어서 성령을 인정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였다(14:6). 이는 예수 자신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파라클레테(παρακλέτε)이며, 성령은 이제 그를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그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서사한 말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 내재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성령은 구속받은 자들의 망므 속에서 이전에 경험한 것을 훨씬 초월하는 일을 행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7:38). 바울은 그가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4:13). 바울은 성령을 프뉴마(πνεμα)”, 8:14; 고전 2:11; 3:16; 고후 3:3 ),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8:9; 4:6; 빌 1:9) 1:9)이라고 표현하였다. 바울은 구원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영을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선교의 모든 현장 속에서 바울은 성령을 인정하고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지금까지 필자는 현대 복음주의 선교 신학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는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과 같은 급진적 이념이나 사회 참여를 통한 개혁이나 제도의 혁명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구령 사업을 감당하는 것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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