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3. 09:57ㆍ선교학 강의
다문화 갈등 현상과 한국교회의 대책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다문화 선교를 위해 한국 교회가 준비해야 한 전략들에 대해 거시적 차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다문화인들의 집결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제들을 수반하게 된다. 사회갈등, 문화 갈등은 물론 종교적 갈등의 문제를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 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이들 갈등을 해소하는 일들이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도출되어야 한다. 결국 교회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은 사회통합을 위한 ‘에큐메니즘’의 적용이라고 본다.
1. 다문화 에큐메니즘 현상
다문화주의는 문화 간의 간격을 좁혀서 하나로 통합되는 에큐메니즘의 요소가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다문화주의란 현대사회가 평등한 문화적, 정치적 지위를 가진 상이한 집단문화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캐나다의 철학자 테일러(Taylor)는 다문화주의를 문화적 다수집단이 소수집단을 동등한 가치를 가진 집단으로 인정하는 ‘승인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로 정의한다. 다문화주의는 온건한 다문화주의와 강경한 다문화주의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온건한 다문화주의는 이국 취향을 통해서 외국의 요리나 패션 등의 소비를 추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강경한 다문화주의는 온건한 다문화내부에 있는 피상적인 다원주의를 극복하면서 민족 정체성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적 논의를 부르는 경우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현존하고 있는 다문화주의는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첫째는 유럽국가(영국, 프랑스, 독일)처럼 비교적 동질적인 문화를 소유한 유형이다. 이들 국가들은 식민지 경영과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외래문화가 자연스럽게 자국에 스며들면서 형성된 다문화이다. 둘째는 국가의 출범 초기부터 다양한 문화와 인종으로 구성된 유형이다. 미국과 캐나다가 이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 유형들 가운데 전통적으로 한국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해왔지만 최근의 상황은 많아 달라지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개념적 정의를 들여다보려면 케이츠의 이론을 읽어야 한다. 문화적 정체성은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대화에서 생성되고 서로 다른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갈등과 절충, 자기형성 및 재형성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모한다. 이러한 문화의 변모는 다문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문화의 공존과 협력이라는 문제는 단일문화라는 전통적 문화개념을 내세우는 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혼합과 융합의 문화현상을 경험한다. 우리의 문화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천년 역사를 지닌 유구한 민족임을 자랑하며 살았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여 이러한 전통적 단일문화 개념은 패러다임의 변천을 수용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즉 문화적 에큐메니즘의 도래가 시작된 사회에 진입했다는 의미이다.
2. 서구의 국가별 다문화주의 정책과 충돌
다문화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현상들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구의 다문화주의 가운데에서도 갈등을 격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은 제 2차 대전 이후에 신영 연방체제(New Commonwealth)를 구축함으로써 과거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이 영국으로 자유롭게 영구 이주를 하였다. 이후 1962년 영연방이주민법(Commonwealth Immigrant Act)으로 이주민을 제한하였으나 법률의 시행 이전에 이미 대규모의 유입이 실현되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이민자의 친인척의 결합 등과 같은 이유로 영국 이주가 두드러졌다.
영국 내의 이주공동체의 성장은 차별 금지와 인간평등 요구의 증가를 가져왔고 극단적인 저항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예를 들면 2005년 7월7일 런던 중심가에서 발생한 지하철 자살 폭탄 테러로 56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파키스탄계 영국인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이민 수용은 1860년대 북아프리카 알제리, 인도차이나 등의 프랑스 식민지 경영과 함께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이민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노동력의 부족과 함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유입된 북아프리카계통 무슬림 노동자들의 2세들이 상인이 되는 1980년대 초반부터 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인 이슬람의 계율에 따른 복장과 문화를 추구함으로써 조금씩 사회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2004년의 통계에 의하면 북아프리카 3국가(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유입된 이민자의 비율은 전체 이민자의 42.7%에 달한다.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실업문제는 급기야 폭동으로 진화되어 2005년 10월 27일 프랑스 도시 외곽지역의 소요사태를 발생시켜 3주 동안 1만 여 대의 차량이 불타는 유례없는 폭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2007년 11월 25일 프랑스 북부지역인 빌리에르벨에서 시작된 폭동은 2년 전 보다 더욱 결렬해져서 학교 2곳과 도서관, 관공서가 불타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오토바이를 몰고 가던 무슬림 청년 두 명이 경찰차와 충돌하여 사망한 사건이었다.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이주민을 받아들인 나라다. 이들의 국제이주 정책은 국가간의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위한 협정 체결에 의해 이루어지며 고용 만기와 함께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독일의 이주민의 특성은 터키 출신을 포함한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고수함으로서 독일 사회에 많은 이슈를 던지고 있다. 특히 외부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 착용이다. 이는 본인의 종교적 상징뿐만이 아니라 독일 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다. 중앙정부의 사회적 통합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정부는 2006년 1월부터 소위 ‘무슬림 테스트’라는 국적 취득을 위한 심성 테스트를 의무화하였다.. 문제는 이 테스트가 이슬람 국가 출신의 외국인으로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와 종교를 비하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점점 확산되어 2006년 3월부터는 헤센 주정부도 도입을 하였다.
현재 유럽은 다문화 유입과 함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2004년 네덜란드 영화감독 테오 반 고흐 피살사건, 2005년 7월 영국 런던의 지하철 폭파사건, 같은 해 가을 프랑스 방리유의 무슬림 소요사태, 2006년 2월 덴마크에서의 마호메트 풍자만화사건 등 사건 등 기독교를 대표하는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대립구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럽의 다문화 정책은 다문화주의 정책과 이주민의 사회적 동화를 염두에 둔 통합정책의 병용이다.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 갈등이 사회의 갈등요소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특히 유럽에서의 다문화주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요소에 의해서 유입된 이슬람 종교를 갖고 있는 무슬림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투쟁은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장소를 넘어서 종교적 네크워킹을 통한 국제적 연대감 속에서 거류 사회를 압박해 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3. 사회통합주체로서의 교회의 역할
서구의 사례에서 보듯 다문화주의가 겪게 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야할 주체는 교회여야 한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 이후에 ‘복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소위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아래의 몇 가지 이론을 제시하며 다문화사회 도래의 초기 시점에서 사회통합의 에큐메니즘의 실현을 위해서 한국 교회의 역할을 기술하고자 한다.
1)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의 역할
교회는 정부를 움직여서 다문화인들이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인간의 보편적 기본권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한 주체로서 자율성과 전문성 그리고 참여성을 통해 다문화 문제 해결의 주체자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자율성이란, 각 주체들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여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의 관여가 시민단체나 이해 당사자들의 자율성을 저해하고 전통적인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문성은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전문성은 거버넌스 체제의 필수 요소이다. 참여성은 중요한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에 주요 이해 당사자 이외에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중국의 다문화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다민족들이 중국의 통일에 기여해 왔다고 주장하여 소수민족의 분리운동을 억제하고 변방 소수 민족을 중국에 통합시키는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의 태도는 구소련이 소수의 민족국가로 분할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세운 정책이라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필자가 2009년 8월 강의를 위해서 북경을 방문했을 때에 소수민족 민속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중국 내에서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소수 민족들의 삶의 모습들을 전시해 놓고 중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구경하도록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소수민족을 동화시켜서 흡수하고자 하는 다민족국가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2) 국제적 관계 속에서의 역할
또한 교회는 국제적 관계 속에서 다문화 결혼이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지 않도록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한다. 최근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을 유보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국제결혼을 통한 한국에로의 다문화 신부 유입이 인권 문제를 야기시켜 국제문제로 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는 수적으로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으로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국내로 유입되는 다문화인들에 대한 뚜렷한 선교적 안목을 갖지 않을 때, 문제가 있는 선교 파송국의 오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다문화인들의 인권 유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공조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1997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이주 노동자, 난민, 국내 강제 이주자를 포함하는 ‘떠도는 이들과 연대하는 해’를 선포하면서 대응방식도 다양화 되었다.
즉 교회 간의 연대, 각국 교회협의회 간, 양자 간 혹은 다자간 협의회로 발전하였다. 일례로 한국-필리핀 교회협의회 간 정기 협의회에서 이주 노동자 문제가 공통 관심사로 제기된 것을 들 수 있다.
교회는 다문화인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정부를 움직이는 힘과 사회를 통합하는 힘, 그리고 국제 간의 공조를 통해서 다문화인들의 문제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사는 사회의 에큐메니즘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인터넷 신문에 실린 미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목사의 외국 근로자 사랑이 낳은 코끼리 한 쌍”이라는” 기사이다. 내용은 스리랑카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코끼리 한 쌍을 비롯해 황금원숭이, 이구아나 등 40여 종의 희귀 동물153마리를 우리나라에 기증한다는 내용이다. 기증을 하게 된 이유는 스리랑카 정부에서 NGO '지구촌 사랑 나눔'지구촌사랑나눔' 김해성 목사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다.
김 목사는 1996년 겨울에 경기 광주시의 도로변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스리랑카인 2명을 발견하였다. 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밥을 먹이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서 2003년 4월 스리랑카 명절 때에 한 스리랑카 노동자가 야당 국회 의원인 자신의 작은아버지를 한국에 초청하게 되었고, 김 목사와 연(緣)을 맺게 되었다. 그 당시 야당 의원은 국무총리를 거쳐서 스리랑카의 대통령이 된 라자팍세이다. 그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스리랑카 대통령이 보은의 차원에서 한국에 많은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겸손과 진정한 사랑,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은 글로벌화된 사회 속에서 한국 교회가 다문화인들에 대해 가져야 할 선교적 마음이다.
3)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의 역할
다문화인들에 대한 사역은 어느 큰 교회의 선교사역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이는 교회의 에큐메니즘을 통해서 공동 사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다문화인들이 선교적 대상임을 인지함과 아울러 파트너십을 가지고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선교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주민과 함께 선교는 확장되었고, 또 이주민과 함께 기독교는 공격을 받았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유럽인의 대이주는 선교에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앤드류 F. 월즈에 의하면 유럽의 대이주는 약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고 논증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이주를 통해 형성된 국가들을 보면,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이주 목적은 가장 먼저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하였다. 경제적인 이득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무역 이외에 노예무역이나 아편무역 같은 부정적인 요인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유럽의 해안 제국들은 점차 쇠퇴하고 아시아의 열강인 중국과 인도 같은 거대한 나라들이 인구를 앞세워 역이주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인구들이 다시금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역 이주 현상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종교적인 요소이다. 유럽의 대이주를 통해서는 기독교의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역 이주 현상 앞에서는 기독교의 세력이 무력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동으로 밀려오는 다문화인들의 종교적 쓰나미 현상을 용기 있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공동의 노력이야 말로 에든버러 선교대회에서 세계선교를 향한 에큐메니즘의 정신이라고 본다.
이제 한국 교회는 소아 기적 아집과 같은 이기주의를 벗어나 세계 선교의 대국답게 영적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아울러 에큐메니즘을 통한 전인구원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이다. 시대적 소명을 상실할 때, 앤드류 F. 월즈의 고백처럼 영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는 처참한 몰골의 박물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
다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현대의 다양성과 개방성에 맞추어서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즉 종래의 단일민족주의나 순수혈통주의는 국제적 고립과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여 스스로 게토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최근에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통해서 갈등 문제를 해결하고 테러와 같은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해소해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가 정부의 정책을 통해서 나왔다면, 교회적으로는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회는 다문화 갈등의 해소를 위해서 정부와 함께 파트너십을 발휘함과 아울러 사회복지적인 차원에서 전략을 가져야 한다. 또한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서 국내 유입 이전부터 문화의 벽을 좁히는 네트워킹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와 교회와의 에큐메니즘의 선교적 정신을 사역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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