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 10:18ㆍ선교학 강의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한 선교 전략
들어가는 말
‘디아스포라라’라는 용어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말이다. ‘디아스포라’는 BC 722년과 586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생긴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포로귀환정책을 통해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미 타국에 정착해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은 그 땅에 주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슬픈 역사의 뒷면으로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선교의 도구로 삼고자 한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특정 인종 집단이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기존의 거처를 떠나 다른 국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자리 잡아 거주하는 현상을 일컫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기원을 19세기 중반으로 볼 수 있다. 즉 1860년을 기점으로, 빈곤 탈출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 변방지역으로 떠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조선 말기인 1903년부터 미국 하와이로의 농업 이민을 통해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서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이민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남미 지역으로 농업이민을 떠나는 사람들, 서구 선진국으로 떠난 유학생들은 물론 최근 조기 유학 등으로 인한 급등한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은 높아진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함께 현재 780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와 같이 해외에 흩어져 사는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한 세계 선교의 전략과 방 안네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특징
1) 빈곤탈출을 위한 디아스포라
1901년 조선은 심한 가뭄으로 극심한 기근이 발생했다. 더구나 그 당시 콜레라와 장티푸스등의 전염병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흉흉한 민심의 움직임 아래 동학란과 같은 사회적 동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때 미국인 선교사 알렌과 그 동료 선교사인 존스는 하와이 이민자를 모집해 101명(남 55, 여21, 아동 25명)의 조선인을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하와이 이민은 1904년에는 3,434명, 1905년에는 2,659명의 한국인들이 이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5년 11월, 미국 이민법이 개정과 동시에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의 하와이로 떠난 한인은 총 6,747명이었다.
또한 중남미 지역의 멕시코로의 이민도 미국의 하와이 이민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인력 송출업체인 〈대륙식산회사〉의 주선으로 1905년 3월 6일 1,033명(남성 802, 여성 및 어린이 231명)의 조선인이 멕시코를 향해 인천항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고자 조선땅을 등지고 타국으로 이민을 선택했지만 그곳의 형편도 녹녹하지 않았다. 이민자들은 24개의 농업에 분산 취업을 하였지만 형편없는 대우와 심한 노동량으로 인해 농장에서 이탈해 낯선 땅에서 도시 빈민으로 삶을 개척해야만 하였다. 현재 멕시코 일대에는 이민자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한인 2-3세의 숫자가 약 1,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의류상을 경영하며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브라질 이민은 1963년 2월 12일 103명의 공식 이민단이 상투스 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그들은 농업 이민으로 브라질 땅을 밟았지만, 업종을 바꾸어 의류 보따리 행상으로 가가호호 집들을 방문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이후 초창기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브라질 수도인 상파울로의 의류시장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봉 레티로(Bon Retiro)와 오리엔트(Oriente)에서 3,000여개의 의류 도매업을 경영하고 있다. 이는 90%에 달하는 점유율로,, 이들을 포함한 많은 한인들이 이민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대부분 이민자들은 경제적인 약자로 출발했기 때문에 생활력이 강할 뿐 아니라 공동운명체적 결사력이 강하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기도 했는데, 일례로 파라과이 아순시온에 설립된 신용금융기관인 메트로 폴리 타나를 들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0년간 빈곤탈출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를 떠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이와 같은 취업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타국에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며 노동력을 제공하고 인권이 유린의 현실을 극복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 특유의 인내심과 성실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날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정치적 망명의 디아스포라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은 많은 한인 디아스포라를 만들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토지 수탈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농민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또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맞서서 싸우는 과정 가운데 애국지사 및 의병장들이 중국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31년 일본이 중국 만주를 점령한 이후 농민과 친일 성향을 띤 교사, 의사, 경찰 등의 조선인을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중국 내 한인 디아스포라는 1930년에 60만 7천명, 1939년 106만 6천명6천 명, 1944년에는 165만 99천 명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인 디아스포라는 독립운동의 시작과 함께 항일 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과 협력해 항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중국 지역의 한인 디아스포라 분포를 살펴보면, 두만강 연안의 연변 지구를 중심으로 삶의 터를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길림성 주변으로 함경도 출신, 압록강 연안의 요녕성 주변으로 평안도 출신, 흑룡강성 지역으로 경상도 출신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망명자들은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때로는 공개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탄압의 부당성을 성토하였고, 때로는 지하에 숨어 게릴라전으로 투쟁하였다.
3) 교육을 위한 디아스포라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자기 발전을 위해 해외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고자 했던 사람들 중 그곳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교육을 통한 디아스포라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어린 초등학생부터 조기 유학을 통해 해외로 나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린 자녀를 타지에 혼자 둘 수 없어 부모 중 한 사람이 자녀를 돌보기 위해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교육지로 떠나고, 한 사람이(소위 기러기 아빠들) 국내에 남아 해외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부담하는 경우도 늘어가고 있다.
얼마 전 미국 국토안보부(DHS)는 외국인 유학생 통계를 인용해 “유학생 감시시스템(SEVIS)에 등록돼 있는 한국인은 모두 87,724명으로 전체 유학생의 14.3%를 차지했으며 이는 국가별 1위”라고 발표 한 바 있다. 대부분 학생들과 함께 보호자인 부모가 미국에 함께 거주하게 됨으로써 한국인은 생활비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외국인이 되었다. 이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유학을 목적으로 선진국으로 이주를 한 뒤, 나중에 현지에 정착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4) 사업성취를 위한 디아스포라
이민 초창기에는 개개인의 생계형 사업이 주류를 이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기업화되고 체계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대한민국 경제력의 상승과 함께 미국, 캐나다 등의 북미 지역은 물론 영국, 체코, 폴란드 등의 유럽, 중동, 동남아 일대에 공장과 기업체를 운영하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업무로 인해 해외에 주재하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늘어가고 있다. 따라서 업무로 인해 해외에 주재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근무지 이동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그곳에 정착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정식으로 외국정부의 투자이민 요청에 의해 자격을 얻어 합법적으로 사업 이민을 떠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주재국에 장기간 머문다든지 아니면 영주이나 시민권을 얻어 생활하는 사람들을 사업 이민자로 분류할 수 있다.
최근 재외 동포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세계 한상(韓商)대회’가 인천에서 사상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세계 한상 대회는 중국의 화상(華商)이나 인도의 인상(印商)처럼 해외 동포 기업인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국제 비즈니스의 장(場)으로 2002년 서울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감사하게도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미국 패코(PACO) 철강의(PACO) 백영중 회장도 26세 때 단돈 5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연 매출액 1억5000달러(약 1425억 원)의 기업으로 키운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5) 국제결혼을 통한 디아스포라
또 하나의 유형으로 국제결혼을 통한 디아스포라를 들 수 있다. 초창기에는 미군의 군속으로 국제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미국의 타코마 지역이나 오하이오주의 라이만과 같이 미국 내 군사기지가 있는 곳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최근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면서 외국인들과의 결혼이 증가하면서 이와 같은 유형의 한인 디아스포라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결론적으로 한인 디아스포라의 특징을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이주 초기에는 현지인들의 다수의 차별과 배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인 특유의 인내심과 끈기, 근면성으로 인해 점차 사회의 중산층으로 상승해간다는 것이다. 둘째는 갈등과 차별의 소지가 많은 공직이나 권력기관보다는 상업에 치중함으로써 경제력 상승으로 점차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민 1세대가 축적한 경제력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많은 투자가 이뤄졌고 이민 2-3세대들은 전문직이나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하면서 점점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당장 거주지가 도시 중심부로 이동되는 현상으로도 확인 된다. 넷째는 이민 역사가 비교적 긴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는 한국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의 서구로 떠난 이민자들은 상대적으로 민족의식이 약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한인 디아스포라를 교회를 향한 선교적 제언
근래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모이면 음식점이 세워지고, 일본인이 모이면 회사가 세워지고, 한국인들이 모이면 교회가 세워진다.”.” 이는 해외 한인들의 기독교적 영성과 선교적 삶이 가져온 결과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해외 한인 사역이 또래 공동체의 집합체 위주였다면, 이제 주제국을 통해서 이웃으로 나아가는 원심력 선교를 위한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선교적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한민족 공동체의 네트위크 선교사역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세계의 교통, 정보, 통신의 발달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대를 불러왔다. 따라서 이제는 정보 종합을 통한 동력화의 선교를 감당해야 할 때이다. 만약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인적, 물적, 영적 자원을 하나로 묶을 수만 있다면 주재국은 물론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선교의 영역과 능력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 중남미 한인 디아스포라의 네트워크를 들 수 있다. 2004년 9월에 아르헨티나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중남미 5개국(아르헨티나, 브라질,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의 한인 디아스포라 목회자와 선교사 16명이 모여서 라틴 아메리카 선교네트워크(LAKOMNTE: Latin America Korean Mission Network)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중남미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의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 NGO의 활용을 통한 사회개발 선교사역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개발자원이 제도화된 형태(Institutional forms of development resources)로서 NGO를 평가하는 시각도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1980년대 이래 개발의 개념이 단순한 경제개발의 차원에서 사회개발, 인간개발, 환경 친화적 개발 및 토착민 보호와 같은 인간 중심의 지속적인 개발(sustained development)로 확대되어 가면서, 자국의 이익이나 기득권에 집착할 필요 없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활동하는 NGO들의 역할이 점점 증대해 졌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보다 경제적인 환경이 열악한 나라에서 사역할 때 매우 중요한 전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한국개발협의회 같은 단체는 무슬림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그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3) 기업을 통한 선교사역
최근 들어 기업을 통한 자비량 선교의 중요성은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로 부각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한국의 선교회들 가운데 선교 현지에서 여행업을 하면서 자비량을 사역을 하는 경우도 있고, 기업운영을 통한 자비량 선교운동도 많이 볼 수 있다.
선교 역사적으로 기업을 통한 개신교의 선교운동의 모델로 모라비안 교도들의 해외선교와 바젤 선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의 경제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교도를 향한 선교 수행에 있다. 실제적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면 중국과 북한을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기업 선교의 전략들이 많이 수립되고 있다.
4) 한인 2세들의 선교자원화 사역
새로운 선교의 주체로서 한인 2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인 2세들이 신학교육과 선교훈련을 받은 뒤, 선교지에 파송된다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타문화 적응 훈련을 마쳤을 뿐 이니라 선교를 위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많은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2세 또는 3세의 청년들을 선교의 현장으로 투입하고 있다. 미국의 JAMA(Jesus Awakening Mission in America)나 KOSTA(Korean Student Abroad)와 같은 단체가 있다. KOSTA는 한국의 엘리트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유학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심어줌으로써 조국 복음화에 기여해 왔다. 이제 코스타는 각 대륙별로 유학생들과 이민 1,5세, 2세대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기관으로 성장했다.
나오는 말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은 조선말기의 재난으로 인한 식량해결을 위해서 한국의 주변국인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일본의 조선 강점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과 미국으로, 경제적으로는 일자리가 있는 일본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945년 한국의 국가 수립과 함께 시작된 해외 이민은 국가 정책적인 측면에서 전문직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로,, 경제적 달러 확보 차원에서는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독일로 떠나게 되었으며, 농업이민으로는 남미를 택해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인 디아스포라의 현상을 198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달라지고 있다. 이는 높아진 한국의 경제적 위상 덕분이다..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12번째 규모로 성장함과 아울러 OECD 국가에도 가입되었다. 또한 한국인인 반기문 씨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일하게 됨으로써 세계 정치에 영향력도 같게 되었다. 따라서 최근에는 역 이민 현상도 많이 나타난다. 현재의 디아스포라 현상은 기업이민이나 자녀들을 위한 해외 유학 이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감사하게도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많이 확장되었다. 그들은 불굴의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고 헌금하고 헌당을 하였다. 이는 한국인이 가진 세계복음화에의 헌신이라고 본다. 이제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에 복음의 전진기지가 구축되었다. 중간시대를 통해서 흩어진 유대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세계복음화에의 기폭제가 되었듯이 한인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초대교회와 같은 선교에 열정적인 전략이 수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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