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

2020. 3. 30. 11:41선교칼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기독교의 선교가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벽을 넘어서 오늘까지 이르게 된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하나님이 쓰신 교회들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의 중심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즉 초대교회는 안디옥교회와 바울과 바나바가 있었고, 중세의 천년은 동서방 교회에서 유출된 선교의 네 단체(프란시스, 도미니크, 어거스틴, 예수회)들이 활발한 선교를 감당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영국의 침례교회에서는 윌리암 케리와 미국 교회에서는 알버트 벤자민 심슨 같은 선교지도자들이 있었다.

  21세기를 열면서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자리 잡고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상의 많은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교회가 아닌 독특성을 지닌 교회이며, 그 중심에는 영산 조용기 목사님이 계신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45년 동안 기독교역사상 가장 급속하게 성장해 왔다. 그리고 활발하게 국내외의 선교를 감당하였다. 짧은 지면을 통해서 국내외의 모든 사역들을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필자는 아래에 소개된 몇 가지 측면에서 선교의 원동력과 추진력, 그리고 역동성을 열거하고자 한다.

  첫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는 선교지도자이신 당회장님의 순복음의 선교신학에 있다. 순복음 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난 충만한 복음, 만세전부터 미리 계획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 지금도 우리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동일하게 행하시는 성령 사역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이론신학과 교리 신학에 젖어있는 신학의 한계점을 극복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복음이다. 즉 이론신학에서 간과하기 쉬운 실제와 적용을 생활화한 복음이다.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적용시키는 작업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이 희망의 신학을 만들어내었다. 목사님의 희망의 신학은 계몽주의 이후에 발생된 인간중심주의적인 신학이 아니며, 타락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인간 속에 역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희망의 복음이다. 이러한 조 목사님의 선교신학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다. 즉 전인구원의 선교가 그것이다. 그의 중심 메시지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가 메시지 후반에 항상 강조하는 축복의 말씀은 네 영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로 축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영산의 삼중복음은 구원을 단순히 내세적인 부분의 신앙생활에서 내 세는 물론 현세의 축복된 삶으로 한 차원 승화시켰다..

  둘째는 복음적 상황화를 통한 초대교회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효과적인 국내 선교를 낳게 되었다. 이 씨 왕조의 멸망과 일제 강점, 해방, 그리고 6.25와 같은 전쟁의 비극 속에서 민족사의 운명은 어두움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이 항상 상존하는 시기였다. 60년대 이후 국가적 과제는 잘살아 보세!”였다. 이러한 때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인간이 정말 잘 사는 것은 예수 믿어 성령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항 가운데에서 조 목사님이 주창한 삼중 축복은 대부분의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도시 빈민들에게 복음의 유용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희소식이 되었다. 사실 명성훈이 지적한 데로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참된 친구가 되었다는 말에 필자도 동의한다.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귀중한 주님의 백성들이다. 이들은 구원의 복음이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남을 체험하였다. 이와 같은 체험들은 예배시간마다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서 증언되고 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사랑의 공동체는 엘림 복지타운과 같은 복지시설을 만들어 사회의 빛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이 공동체는 이제 동토의 벽을 넘어서 북한의 결핵퇴치사업과 NGO를 통한 지구촌 구석구석의 필요한 손길들을 찾아가고 있다.

  세 번째는 교육선교이다. 특히 순복음신학교를 비롯한 한세대학교, 국제신학원, 그리고 해외의 선교의 전진기지를 활용하기 위한 미국의 베데스다 대학설립 및 운영과 같은 교육 사역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해외의 선교지에에서 필리핀 극동 신학교,, 고베 극동 신학교 같은 교육기관들을 설립 및 후원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사역은 순복음의 체질화에 크나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한세대학교에 대한 선교적 결과들을 이 글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다. 한세대학은 김성혜 총장님의 취임 이후에 사람, 학문,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교육의 지향점에서 제2 창학을 서두르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다양성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인재 양성의 기준도 다양성과 전문성, 그리고 세계화에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서 해외의 유명대학들과의 자매결연을 통해서 새 시대의 일꾼들을 육성하고 있다.

  넷째는 도시선교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비록 여의도에 교회를 헌당할 당시에만 하더라도 서울의 중심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정학적인 면에서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대도시 주변을 벨트화 하여 지성전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하도록 전략을 구사하였다. 도시는 다양한 기능뿐만이 아니라 인구밀집 지역으로서 선교전략에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자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인구의 사회적 이동 현상이 나타나 도시의 수 도 급속히 늘었고 도시인구도 증가되었다.

  사도바울이 선교 방법으로 삼았던 거점도시 확보의 전략은 현대의 선교 전략과 목회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교회성장학자 D. McGavran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다윗성에서 탄생하였고 씨저의 큰 도시들 속에서 성숙하였다”라고” 말했다.

  다섯째는 매스컴의 활용을 통한 선교 방법이다.. 복음의 전달 수단(communication)은 각기 시대마다 문화적인 수단과도 동일시됨을 알 수 있다. 특히 현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 근대 산업사회의 결과물인 테크놀로지(technology)를(technology) 이용하여 음악, 미술 등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과 지리적 제한성을 최대한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시도한 것이 매스컴 선교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문서선교의 개척자라고 평가하고 싶다. 담임 목사님은 세계의 모든 지역이 복음 방송과 문서 선교에 대해서 닫힌 지역이 많은 반면에 한국은 미국과 함께 완전히 열려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매스컴 선교의 전략은 TV와 라디오, 그리고 인터넷은 물론 문서 선교에 있어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매스컴 선교의 활용에 있어서 매주일 지성전을 연결하여 드리는 화상 예배는 현대인들의 삶의 자리인 시 공간을 초월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월간지인 신앙계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기독교 세계관의 형성은 물론 기독교 문화의 진흥을 위해서 일간지인 국민일보를 창간하였다. 사실 일간지를 발행한다는 것은 많은 모험과 경제적 손실이 있을 것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일간지의 발행은 신문(News Paper)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유사 기독교를 자처하는 통일교에서 만들어서 대중화시킨 세계일보는 언론의 힘을 통해서 사회와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자리를 잠식해 오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에 영산의 일간지 창간과 유지는 문서선교 역사에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섯 번째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와 함께 공유하며 나아가는 동반자 의식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구촌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선교운동으로 승화시킨다. 순복음의 공유는 해외의 삶의 현장에서 충족시켜야 할 영육 간의 문제들을 채워 주는 일이었다. 먼저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 주는 일은 당회장님의 해외 순회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4년 조 목사님의 해외 사역 이후에 수없이 많은 집회와 세미나 인도를 위해서 미주, 유럽, 동구권, 아프리카, 아세아 등의 오대양 육대주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활발하게 뒷받침해 주었던 기관이 순복음실업인선교회이다. 실업인 들은 자신들이 가진 축복을 나누는 일에 앞장을 섰다. 동반자 의식의 선교는 원주민 사역으로 이어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선교를 위해서 197541일 순복음 세계선교회를 설립하면서부터 현재까지 매주일 설교가 마친 다음 선교사를 국가별로 파송하고 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성령 충만의 선교이다. 즉 성령으로 충만될 때에 결국 물이 차고 넘치듯이 성도는 선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명성훈은 그의 책 교회성장의 영적 차원에서 세계선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낯익은 낱말이다 “라고“ 말했다. 우선 성전에 넓게 쓰여진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에서와 최자실 목사님의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통해서 교회의 사명은 선교에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의 선교는 인간이 본인의 의지와 결단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하여 지위와 통제를 받는 일이다. 보어(Harry Boer)는 선교사역은 대위 임령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증거 하는 교회가 된다. 이는 어떠한 외부로부터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생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함으로서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성령 충만의 복음은 선교현장에서 당연히 신유 같은 기적이 나타난다. 18세기 미국 선교의 흐름 가운데 태동된 신유 신학은 중요한 신학 사상의 흐름이었다. 신유(Divine healing)론자) 이던지 아니면 믿음의 치유(Faith healing)를 주장하던지 간에 모두들 인간의 치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였다. 그리고 이는 선교운동으로 이어지는데 다리 역할을 하였다. 신유의 신학은 서구에서 주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또한 조용기 목사님 에게는 실증된 복음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신유(Divine healing)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성장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방법이 됨을 논증하였다. 현대의 선교에 있어서도 신유가 필요한 사역인가에 대해 영산의 대답은 문명의 발달이 인류가 가진 사회악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성령의 능력으로 신유의 복음이 더욱 필요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하겠다. 지금까지 필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일곱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말미암아 동방의 조용한 나라인 한국의 위상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높게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조용기 목사님의 피 눈물 나는 성역 45주년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역은 75만에 이르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었다. 시간의 길이보다는 그가 이룬 선교의 업적은 세계 교회사에 크나큰 족적이 기록되어 가고 있다.

  당회장 조용기 목사님은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가 가진 선교적 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아세아 여러 나라 중 특별히 한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성령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교회와 교인들도 다른 나라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한국이 마지막 때에 선교의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농부들은 모를 심기 전에 먼저 못자리를 만들고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다른 논에 심습니다. 한국이 바로 이 복음의 못자리입니다.”

  목사님의 통찰력은 21세기 세계선교를 한국 주도의 선교를 말하고 있다. 영산의 언급처럼 지금 세계의 구석구석에 한국 선교사들이 1만여 명이 넘게 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교회를 통해서도 600명이나 되는 해외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고 있다. 목사님의 성역이 50주년을 넘어서 60주년이 될 때에는 더 많은 선교사가 그의 사역을 통해서 파송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59순복음가족신문 기고

 

'선교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일을 계획하자  (0) 2020.03.30
예루살렘의 선교행진  (0) 2020.03.30
스포츠 선교  (0) 2020.03.30
순복음(Full Gospel)의 시대적 요청  (0) 2020.03.30
선교를 위한 종(servant)  (0) 2020.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