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 15:16ㆍ선교칼럼
노르웨이 테러 사건과 문명의 충돌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사무엘 헌팅톤은 21세기의 현상 가운데 나타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문명의 충돌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특히 문명의 충돌 가운데 핵심은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다. 이들 두 집단들 간에는 원리주의적 사고가 깊어 갈수록 충돌의 양상은 더욱 깊이 나타난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범죄자 브레이빅에 의해서 일어난 테러 사건은 문명의 충돌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국내 일간지인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에 “이슬람·페미니즘 증오로 똘똘 뭉친 '인간 괴물'”이라는 제호 아래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브레이빅은 테러를 통해서 대통령궁과 오슬로에서 38㎞ 떨어진 우토야 섬의 노동당 청소년 여름 캠프장을 각각 폭탄과 총기난사를 통해서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범행 선언문에 따르면 브레이빅은 테러를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최근 2~3년이지만, 20대 초반부터 9년간 무슬림 이민자 유입을 촉발한 유럽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 '사상적 배경'을 쌓아왔다. 선언문 제목 '2083:유럽 독립선언'은 오는 2083년까지 유럽 각국이 극우 보수 정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 무슬림 이민자를 내쫓아야 한다는 뜻으로, 중동 이슬람 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유럽을 탄생시켜 기독교 문화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는 "불충분하게 죽이는 것보다는 많이 죽이는 게 낫다"며 "사람들은 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거대한 괴물로 부를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보고서 상당 부분을 할애해 유럽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 문화적 마르크시즘(Marxism)을 격렬히 비난하고 있다. 극우 성향 책 몇 권과 위키피디아 등을 주로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논문'은 "20세기 초 안토니오 그람시와 에리히 프롬 등 진보·자유주의 학자들이 반(反) 유럽주의 와 자해적인 인도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라고" 시작한다. 고졸인 브레이빅은 유럽 대학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란 미명 아래 유럽 각국 고유의 문화적 자긍심을 깎아내리고 있으며, 이것이 이슬람 무장 단체의 테러와 무슬림의 유럽 일자리 잠식 같은 '유럽의 무슬림 노예화'를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한편 '무슬림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이용해 저지른 테러'로 2011년 9·11 테러와 함께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나란히 예로 드는 등 체계가 결여된 편집증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범죄자 브레이빅은 또 11세기 서유럽이 성지(聖地) 회복을 위해 이슬람권을 공격한 십자군 원정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며 당시 비밀 특수부대였던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의 활약상을 자세히 소개했다. 템플 기사단의 문장으로 선언문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으며, 이를 제목으로 범행을 예고하는 12분짜리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특히 그는 2002년 영국 런던에서 십자군 운동의 부활을 원하는 극우 인사 9명이 8개 유럽국을 대표해 모임을 가졌는데 자신이 그 일원이었다고 밝혔다. 그의 선언문에선 성인이 된 후 느낀 개인적 좌절감을 정치 이슈로 확장한 듯한 느낌도 배어난다. 친구들이 동등한 경제권과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여자들과 사귀며 겪는 고민을 실명을 밝혀가며 자세히 소개하고 이를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여권 신장 운동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가부장제 회복이 대안이며 일본이나 한국 모델이 해결책"이라고 하는 식이다. 노르웨이의 테러 전문가 토마스 헤가 메르는23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마치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선언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상이 극단적 이슬람주의라면, 브레이빅의 테러는 극단적 기독교 세력의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앞으로의 두 세력 간에는 끊임없이 충돌이 이어질 것이다.
한국도 점점 다문화주의가 스며드는 국가가 되었다. 이는 산업화의 구조 속에서 노동력의 유입과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거주 이동이 자유로운 현상 가운데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문명의 충돌이 언젠가는 이 땅에도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이 일은 교회가 앞으로 해야 할 선교적 몫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대를 사는 모든 인간의 행동을 변화 시키는 것은 테러나 증오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다.
2011년 7월 31일 “교회와 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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