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조 목사의 선교 열정

2020. 4. 2. 11:55선교칼럼

하용조 목사의 선교 열정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하용조 목사는 지난 8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개신교회가 사회의 여러 곳으로부터 공격과 함께 비난의 표적이 된 요즈음에 국내의 많은 매스컴들도 그분의 죽음을 안타 가워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필자는 CCC 간사로 있던 젊은 시절 그분을 만났다. 잠시 나눈 대화를 통해서 선교에 열정과 전략이 분명하신 분이심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을 통한 선교의 열매들이 맺혀 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이해한 선교 전략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문서 선교를 감당하였다. 문서선교의 중요성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권의 서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보여 주었다. 하 목사를 통해 만들어진 두란노서원은 기독교 서적의 독특한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교회성장과 목회를 위한 목회와 신학”, 평신도의 바른 삶을 위한 빛과 소금같은 월간지는 한국교회를 다양한 면에서 견인해 가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둘째는 문화 변혁의 선교를 감당하였다. 문화는 항상 보수성을 띠면서 타협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의 보수성도 문화적 변혁을 꺼린 것이 현실이다. 이에 반해서 하 목사는 경배와 찬양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회의 문화적 변혁은 물론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게 만들었다.

  셋째는 교육 선교이다. 그는 많은 교육 기관을 돌보면서 사역을 하였다. 직접적으로는 햇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의 총장으로서 국내의 예비 목회자는 물론 세계에서 한국으로 유학하려 온 젊은 주의 일꾼들을 양성하였다. 필자는 그가 총장으로 재직한 햇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의 학습 탐구를 보면서 하 목사의 숨은 열정을 측정할 수 있었다.

  넷째는 성경 중심의 선교이다.. 그는 강해설교를 통해서 성경이 가진 진리에 대해서 연구하고, 정황에의 대입을 통해서 변함없는 성경의 진리가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에 오류 없이 증거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같은 그의 노력은 데니스 레인 목사와 존 스토트의 영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이 신앙의 중심이 됨을 가르치고 확증하도록 만들었다. 바이블 칼리지와 QT 학교 같은 프로그램이 좋은 예이다.

  다섯째는 선교동원의 전략을 가지신 분이다. 1994년부터 2010년까지 2,000명 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10,000명 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운다는 원대한 비전은 함께한 성도들로 하여금 도전을 받게 만들어 그의 사역을 통해서 동력화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전략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들이 그분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상과 같은 엄청난 일들을 하도록 만들었던 계기는 한국 CCC의 창시자인 김준곤 목사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분의 간증대로 김준곤 목사에게서 기도와 말씀의 능력 그리고 선교를 배웠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일하고, 누구를 쫒아 가느냐에 따라서 생활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인 1966년 경기도 입석에서 열린 CCC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 사역자로의 꿈을 키웠다고 말하였다.

  하용조 목사는 폐결핵과 7차례의 간암 수술을 견디면서도 굳건히 사역하였다.. 오히려 질병은 나의 동반자라는 명언을 남길 만큼 절대 주권의 신앙을 가졌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하고 죽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순리 앞에 어떤 족적을 남기고 가느냐가 삶의 질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용조 목사님은 위대한 족적을 유산으로 우리들 속에 남겨 주었다. 그 유산은 당장은 희미하게 보이는 족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더 선명하게 한국 교회 속에 남게 될 것이다. 마치 바울의 발자국처럼 말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아쉬운 것은 비단 필자의 마음뿐만은 아닐 것이다.

2011810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