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 15:13ㆍ선교칼럼
존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과 선교적 함의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지난주에는 존 위클리프의 성경번역과 선교와의 함의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필자는 오늘 존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과 선교적 함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존 위크리프 신학사상 형성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유명론]으로 유명한 윌리엄 옥캄(William of Ockham)의 영향을 받았다. 1374년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를 루터워스(Lutterworth)의 교구 사제로 선임했고 왕과 교황을 중재하기 위하여 교황의 대리인을 만나기 위해 왕의 대리인의 한 사람으로 브뤼셀에 파송하였다. 이 무렵 위클리프는 "은혜에 기초한 주권"(dominion founded on grace)에 대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가 말하는 주권(dominion)은 교회 혹은 국가 내의 권위를 실행하는 권리 또는 자산에 대한 권리를 모두 의미한다. 그는 이 같은 권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 부여된 것이며, 교회나 국가는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부터 그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도덕적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교회나 국가의 공식적 직임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교회가 죄악에 빠졌기에 모든 유형무형의 자산을 포기해야만 하며, 성직자는 완전히 청빈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왕에 의해 실행되었다. 위클리프는 1376년부터 1378년까지 그의 조카 리쳐드 2세 때까지(1381) 영국을 통치했던 가운트의 존(John of Gaunt)을 성직자로서 보좌했다. 그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명백하지 않지만 추측컨대 성직자의 부와 명예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가운트가 위클리프를 배려했다고 여겨진다.
1377년 왕과 의회는 위클리프에게 전통적으로 로마에 상납하던 일을 보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했고 위클리프는 그에 대하여 응답하였다.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다섯 가지의 사항에 대하여 지불을 요구했으나 그 요구는 수락되지 않았다.
위클리프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교회 안에서 신성하게 보호되던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그 신성의 장막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을 끌어내는 논쟁을 하였던 1378년에 있었다. 그 후 1381년 위클리프는 그의 개인적인 삶을 위하여 루터워스(Lutterworth in Leicestershire)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은퇴 후도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부패를 엄하게 공격하는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이런 통렬한 비난은 예전에는 유례가 없던 것이었다. 1381년 재앙은 농민반란(the Peasants' Revolt)과 함께 부닥쳐 왔다. 식자층에게 퍼져있던 위클리프의 가르침과는 달리 위클리프의 사상은 반란을 부추기는 역할에 이용되었다.
사실상 많은 농민들은 지주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리하여 위클리프의 "은혜에 기초한 주권"(dominion founded on grace) 사상은 극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위클리프의 운동은 농민반란과 함께 유혈 진압되었다. 1382년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384년 12월 31일 두 번째로 발병한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을 최종의 권위로 주장함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공격하였다. 1378년 『성경의 진리』(The Truth of Holy Scripture)라는 저서를 통해서 성경이 최종의 규범이며, 이 규범에 의해서 교회, 전통, 종교회의, 심지어 교황 자신도 평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는 성경의 권위를 높이면서 교황의 권위를 낮추었다. 그는 1379년 『교황의 권력』(The Power of the Pope)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교황제도는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제도이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이 아니라고 논 중했다.. 심지어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몰아세웠다.. 셋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반대했다. 1379년 『배교』(Apostasy)라는 책과 『성례전』(The Eucharist)라는 책을 통해서 화체설을 비판하였다. 화체설에 대한 위클리프의 비판은 “먼저는 화체설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논리적으로 일괄성이 없다. 그리고 성경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가졌다.
필자는 오늘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을 보면서 우리 교계에도 선교적 사상으로 충만함으로 세계를 진리의 복음으로 채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1년 7월 10일 “교회와 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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