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3. 18:03ㆍ선교칼럼
폴 프리드의 트랜스 월드 라디오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폴 프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세계의 전역을 커버하는 방송인 트랜스 월드 라디오(Trans World Radio)의 설립자이다. 1954년에 설립된 이 방송국은 모두 합쳐서 500만 와트 이상을 내어 보내고 있어서 세계 인구의 80%가 가청 대상이다. 이 방송국의 연결망은 몬테카를로(Monte Carlo)로부터 시작하여 보네어(Bonaire), 스와질랜드, 키프러스, 스리랑카, 괌 등지에서 80가지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매일 기독교의 메시지를 방송하고 있다. 이 방송국이 설립되어서 복음을 증거 하기까지 폴 프리드와 그의 아버지 이신 랄프(Ralph)의 헌신은 대단한 것이었다.
폴 프리드는 아버지인 랄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신 랄프는 회사의 지배인이었으나 선교의 소명을 받고 나약 선교사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C&MA 소속의 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파송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무슬림 지역이기 때문에 아버지인 랄프는 자녀인 폴 프리드를 예루살렘 지역의 선교사 댁에 맡기어졌다.. 부모와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은 어린 폴 프리드 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13세가 되는 어느 날 가족이 보고 싶어 아버지에게 전보를 띠운 후에 선교사님 댁에서 가출을 하였다. 아버지인 랄프도 깜짝 놀라 가족과 합류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사역지인 팔레스타인에서 독학으로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나머지 2년 과정은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휘튼대학을 인류학을 전공하여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나약 선교사 대학에 입학하여 많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중에 한 사람인 HCJB의 설립자였던 클래런스 죤스 였다.
폴 프리드는 나약 선교학교를 졸업한 후에 선교단체인 YFC에 잠시 몸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방송 선교의 꿈을 안고 1951년 아내인 베티 제인(Betty Jane)을 대리고 스페인을 여행하였다. 결국 스페인에서 40km 정도 떨어진 탕헤르(Tangier)를 선택하였다. 방송국을 설립하기 좋은 장소인 버려진 학교를 헐값에 구입하였다. 폴 프리드 부부는 방송국 설립을 위한 모금 홍보를 위해서 스페인 사람들을 극적으로 묘사한 “반데릴라(Banderilla)”“반 델릴라(Banderilla)”를 제작하였다. 이후 폴 프리드 부부는 어린 자녀 2명을 데리고 미국과 캐나다를 도는 16,000km의 모금 여행을 시작하였다.
폴 프리드의 방송국 설립 계획과 활동은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방송에 대한 전문지식의 결여였다. 그리고 기존 선교단체와 연결되어 있않는 독자적인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이 폴 프리드의 선교를 향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폴 프리드와 아버지이신 랄프는 1954년 2,500와트의 출력으로 TWR 방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모금사역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했다. 방송국 운영에 따른 부체가 날로 증가되었다. 지불해야할 청구서들은 날로 쌓여 갔다. 심한 스트레스와 함께 사역을 포기할 위기가 닥쳐왔다. 이러한 나날이 지속되던 며칠 후 한 목사님이 폴 프리드를 찾아왔다. 그리고 헌금을 하였다. 시사리 이 헌금은 폴 프리드의 아버지인 랄프 선교사를 위한 것이었다. 이 재정 후원이 TWR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이후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들이 후원을 하였다. 방송을 시작한 지5년 후인 1959년 에는 직원 수는 2명에서 25명으로 늘었다. “탕헤르의 목소리(The Voice of Tangier)”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ㅍ퍼져 나갔다. 그리고 철의 장벽인 동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모로코가 독립하면서 방송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모로코는 모든 방송국을 국유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끈질긴 협상 끝에 방송국을 몬테카를로로 옮기기로 하였다. 1960년 9개월간의 방송 중지 끝에 10,000와트로 방송을 재개하였다.. 유럽의 24개 언어로 방송이 확장되었다. 폴 프리드는 네덜란드 관리들을 만나서 네델란드령인 안틸 제도(Antilles)에 방송국을 세울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결국 255km(평방킬로미터)의 자갈과 암석으로 둘려 쌓인 보네어(Bonaire) 섬을 새로운 방송국 터로 사용하였다. 1964년 여름 공사의 대부분이 끝나자 TWR은 서반구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보네어에서 방송이 시작된 이후에도 4개의 방송국이 더 설립되었다. 그리고 직원 수도 400여 명을 초과하였다.. 스페인에 복음을 전하려던 폴 프리드의 처음 계획보다도 더 넓게 세계를 향한 복음 방송이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2013년 6월 2일 “교회와 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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