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6. 14:48ㆍ선교칼럼
신월동 아저씨와 자선냄비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올해도 전국의 골목마다 울리고 있다. 그리고 자선냄비에 얽힌 미담들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올해에도 예외 없이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월동에 거주하는 나이 든 신사 한 분이 1억 원의 수표를 자선냄비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 분은 3년 전부터 매년 1억 원가량의 헌금을 자선냄비에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선냄비에 1억 원짜리의 돈을 넣으면서 하는 말이 “좋은 일을 하는 데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한다. 그분이 흘린 눈물은 헌금을 수혜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고마움의 선물을 안겨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자선냄비를 세상에 들어내어 놀게 만든 기독교 단체는 구세군 교단이다. 구세군의 유래는 1865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가 가난한 사람들과 근로자들이 교회로부터 배척되지 않고, 모든 계층이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를 만들고자 구세군을 창립했다. 본래 ‘기독교선교회’로 알려진 단체가 1878년 구세군이라는 명칭을 채택했고, 조직의 구조를 상징적인 군대식으로 정했다.
자선냄비의 유래는 해마다 연말이면 거리의 온정 냄비로 등장하는 빨간색의 자선냄비와 구세군 아저씨들의 모습은 너무 따뜻하고도 든든한 모습이다. 자선냄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도시에 사는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사관(조셉 맥피 정위)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상상외로 온정의 물결은 성공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웃을 돕기 위해 새벽까지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깊은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실시하게 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모든 이들에게 이웃사랑의 절실한 필요성을 되살려 주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 만들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1928년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 준섭(조셉 바아) 사관이 12월 15일 명동거리를 시작으로 충정로, 종로 등 서울 시내 주요 지역에 설치되어 당시 813원이 모아져 불우 이웃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한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서 비록 불신자라고 하더라도 자선냄비에 헌금을 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연말 이면 보게 된다.
이런 시간에 신월동 아저씨의 1억원 수표의 헌납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 그리고 소박하게 삶을 꾸려가는 소시민들, 한 가족이 모두 모여 찬송을 들고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역동적인 힘이 솟는 순간이 된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희망의 소식이 된다. 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소수의 사람들, 그것도 사회적으로 밤일이나 하는 지극히 약한 자들인 목동들에게 나타났다.
가난한 자에게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성경 속에서 많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나사렛 동내에서의 첫 설교는 이사야서 61:1-3절을 인용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구체적으로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만 대접해도 그 상을 잊어버리지 않으신 분이 주님이시다(마 10:42). 마태복음 25:31-46절을 보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심판의 기준이 선포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차 주님이 오시면 믿는 사람들을 다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심판 하실 것이다.
2013년 12월 29일 “교회연합신문 선교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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