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6. 14:54ㆍ선교칼럼
베티와 죤 스탬의 순교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정치적인 혼란은 뜻하지 않게 선교사들의 순교를 가져온다. 20세기 초의 중국은 많은 혼란을 겪은 시기였다. 당시 중국을 다스리던 손문이 1925년 서거하자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지방에서는 열 개가 넘는 정부가 탄생이 되고, 변경 지역에서는 제각기 군대의 힘에 의한 지배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모택동에 의한 공산당의 출현은 인민재판과 같은 극악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처형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세력으로 장개석의 나타남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나라는 경고가 수없이 내려졌다. 이러한 와중에 1927년 한 해 동안에 50%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을 등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중국 내지 선교회마저도 최소의 인원만을 남긴 채 안전한 지역으로 철 수 하였다.
복잡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중국내지선교회는 상황을 새롭게 정비해 갔다. 1929년 선교회 대표로 있었던 호스트(Hoste)는 자신의 본국에 다음 2년간의 사역을 위해서 200명의 일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부름에 무디 성경학교 출신으로서 중국 장로교 선교사의 딸이었던 베티 스코트(Betty Scott)가 있었다,
무디 성경학교 재학 중에 있었던 베티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기도회에 나갔다. 그 기도 모임에서 중국 선교를 지원하고 있는 죤 스탬(John Stam)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베티와 죤은 서로 마음이 끌리고 선교를 향한 비전도 같았지만 결혼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당시 중국 선교에 필요한 인원은 남성이었기 때문에 선교지를 향한 죤 스탬에게는 맞지 않는 상황으로 여겼다.
1931년 가을, 죤이 무디 성경학교 졸업반 일 때 베티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게 된 죤은 미국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 되고 해외 정세는 어둡지만 세계 복음화를 위해 매진해 나가고자 호소를 하였다.
1932년 가을 학교를 졸업한 죤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중국에서의 선교사역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죤은 중국에 도착한 후에 상해에서 베티를 만나게 되었다. 베티는 신병 치료를 위해서 그곳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약혼식을 가졌다. 이후 1년 후에 베티의 부모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이후에도 두 사람은 중국 내지 선교회의 선교기지가 있는 슈안 쳉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1934년 9월 베티는 딸을 낳아 헬렌 프리스킬라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해 가을 베티와 죤은 2년 전에 철수하였던 안훼이라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라는 임무를 선교 본부로부터 받았다. 그곳에는 공산당의 출현이 뜸해져서 평온 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불행스럽게도 선교본부의 예측과 중국 당국의 예상은 빗나갔다. 스탬 일가가 11월 말에 도착하여 12월 첫 주도 지내기 전에 그들의 집이 공산군의 습격을 받아 감금 되었다. 죤은 이러한 경황 중에서도 중무장한 군인들의 허락을 받아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 편지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저와 아내와 아기는 현재 친테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석방 대가로 2만불의 몸값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가재도구와 소유물은 공산군에게 압류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저녁도 먹을 것을 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는 견딜 수 있는 인내와 용기와 마음의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 놀라운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편지를 쓴 다음날 스탬 가족은 이웃 도시를 향하여 고된 행군을 강요받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행로 였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겉옷을 벗기고 시가지를 행진하며 놀림을 당했다. 그런 이후에 게릴라 대장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공개 처형하였다. 중국의 신자들이 스템과 베티 부부가 순교당한 지 30시간 이후에 한 집에 버려져 있는 선교사의 딸인 헬렌을 구해서 쌀 바구니에 실려서 150Km의 산악 여행을 거친 다음 다른 선교사의 가정에 인도되었다. 필자는 하늘나라에서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실 두 분 선교사님들의 선교적 열정이 한국교회 속에도 충만히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2014년 2월 9일 “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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