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의 순교자 폴 칼슨

2020. 4. 6. 14:58선교칼럼

콩고의 순교자 폴 칼슨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폴 칼슨(Paul Carlson)1928년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했다. 기독교적인 영향 아래서 성장하면서 해외 선교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칼슨은 UCLA를 한 학기 동안 다닌 후에 잠시 해군에 근무하고 나서 시카고에 있는 노스 파크(North Park)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간호원이었던 로이스(Lois)를 만나서 1949년 약혼을 하였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8년 후에 폴 칼슨은 아내와 2명의 자녀 그리고 의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하였다. 아내인 로이스에 의하면 칼슨은 의료 선교사에 대한 언급을 차츰 회피하더니 결국 선교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말도 꺼내지 않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였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1961년 기독교인 의사협회(Christian Medical Society)가 보낸 편지로 인해 선교에 대한 폴 칼슨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협회에서는 콩고에 당장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과 4개월 동안만 봉사해 주면 감사하겠다는 제안이었다. 폴 칼슨은 4개월 동안이라도 봉사를 하여 청년 때 서원한 선교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19616월 로이스와 2명의 자녀들 미시간에 남겨 두고 콩고로 떠나게 되었다.

  폴 칼슨이 도착하기 1년 전부터 콩고의 상황은 매우 어두웠다.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콩고는 외국인들을 추방하였다. 콩고 정부는 지도자와 공무원의 결핍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또한 정부에 대한 반대파 부족인 심바족은 기독교인들과 서양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폴은 1961년 레오폴드빌(Leopoldville)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콩고의 불완전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폴은 우방 귀(Ubangi) 지방에서(Ubangi)지방에서 5개월을 사역하면서 의료선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미국에 돌아온 폴은 이미 선교지에서의 계속적인 사역을 위한 마음의 준비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이미 현대적인 의료시설과 교회들이 많은 미국에서는 자신의 삶을 불태울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에 가졌던 선교의 마음이 살아나면서 인생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료 선교사로 헌신해야 하겠다는 서약을 지키기 위해서 칼슨 가족이 콩고에 도착한 때는 1963년 여름 이었다. 자신이 몸담았던 미국 복음주의 언약교회(The Evangelical Covenant Church of America)의 소속으로 콩고에 파송되었다. 그들이 사역한 지역은 우방기 지역에 멀지 않은 와솔로(Wasolo) 지역으로서, 전 지역을 통틀어서 3명의 의사가 있을 뿐이었다. 폴은 의료 진료를 시작하자 매일 200여 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치료하여야 하였다.

  폴의 가족이 콩고에서 사역하던 첫해는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2년째가 되자 사태는 심각해졌다.. 폴이 몸담고 있는 와솔로에 반란군이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9648월이 되자 심바족은 그 지역의 정부군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위험을 감지한 폴은 자구책으로 로이스와 아이들을 국경 넘어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으로 피신시킴과 아울러 병원으로 돌아가 철수 준비를 하였다.

  철수 준비 중에도 병원에서 평상의 업무를 진행하였다. 시민들, 정부군, 심바족의 부상자들을 치료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주일날 콩고의 강을 건너서 피신해 있는 가족들을 만났다. 콩고로 돌아오기 전에 다음 주에 철수하여 합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폴 칼슨과 가족들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폴 칼슨은 사역지로 돌아온 다음 반란군에 붙잡히게 되었다. 거의 3개월 동안 감금되어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했다. 10월 말이 되자, 그곳 스탠리빌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폴 칼슨이 미국의 용병으로 스파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구금하였다고 발표했다.. 결국 폴 칼슨은 스탠리 빌 거리에서 총살을 당하면서 순교하였다.

  콩고인 목사가 장례의 주례를 담당하였다. 수 백명의 콩고 기독교인들이 폴이 사역하였던 카라와(Karawa) 마을로 꽃과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찾아와서 마을에 뿌렸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한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링갈라(Lingala)어로 새겨진 폴 칼슨 무덤의 비문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쓰여 있다.

2014216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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