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성령님께 순종하는 선교의 원리

2020. 6. 2. 09:16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의 성령님께 순종하는 선교의 원리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세계다문화진흥원 원장)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선교사역을 하였다. 성령에 대한 구약의 단어는 루아흐인데 칠십 인 역에서는 이것이 보통 프뉴마(πνεμα)”로 번역되어 있다. 성령은 인간들 속에서 인격적인 면, 도덕적인 면, 그리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활동하신다. 초대교회는 이방 선교를 감당함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사역의 전부가 성령의 지시와 순종에 의한 사역이었다. 성령은 교회의 선교사역을 주관하고 지휘하신다. 교회의 머리는 승천하셨던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교회활동의 모든 것들을 통제하여 인도하는 일은 성령님의 역사이다.

1. 사도 바울의 성령 이해

  바울의 성령 이해를 고찰하기에 앞서서 그의 서신서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의 사람만이 믿음을 고백하고(고전 2:5; 12:3; 1:29), 구원의 은총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인식하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8:15; 4:6). 특별히 성령은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궁극적 의미를 깨닫게 만드시며(고전 2:6-16; 12:3; 8:9), 점진적으로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를 시켜 가신다(8:28; 고후 3:18).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은 마지막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지닌 신령한 몸(σμα πνευματι κόν)”으로 변화를 받는 데서 끝이 난다(8:11; 고전 15:45; 6:8).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씻음과 구원과 의롭다 함의 현재적 출처 역할을 하는 반면에(고전 6:11; 15:16; 5:5; 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시대에서 성령의 선물이 장차 있게 될 보다 영광스러운 변화의 보증도는 첫 열매(ρραβν 고후 1:22; 5:5; 1:14, 8:23))”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울의 언급을 살펴볼 때 하나의 중심사상은 구속론적인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한수는 바울의 성령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그가 성령에 구원론적인 기능들을 귀속시킨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바울의 구속론적인 성령 이해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는가? 즉 구약에서 부터 오는 전승, 중간시대 유대주의로 부터 오는 전승, 공관복음 에서 부터 오는 전승 등 다양한 학설들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전승들이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구속론적인 언급과는 다르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의 사역 속에 구원론적 차원을 부여한 최초의 기독교 저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구속론인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한수의 바울에 대한 성령이해를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새 언약의 영(the Spirit of the New Covenant)”이다. “...새언약(καινς διαθήκης)... 의문은 죽은(γράμμασιν ποκτείνει) 것이요(고후 3:4-4:6).”여기에서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면서 새 언약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인식의 새로움을 부각하고 있다. “의문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으로서(24:7) 이는 율법중심의 생활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결코 인간에게 의롭다 하는 선물을 가져다줄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은 새로운 삶을 가져오며(7:6; 8:3), 이 새로운 언약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피(13:20)로 새롭게 조인되는데 성령의 임재로 성취된다.

  둘째로, “새 창조(καινή καίσις)”를 도래시키는 종말론적인 영이다(고후 4:6).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바울은 여기에서 창세기 1:3의 창조의 빛 을 인용하면서, 새 언약의 영이 행하시는 새로운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셋째로, 신자들의 집단(교회) 속에(교회) 활동하심이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은 교회의 예배(3:3; 고전 14:15)와 교회의 친교(4:3; 2:1)와 은사들(고전 12:4-11)과 교회의 기원(고전 12:13)은 성령님의 생동적인 임재에 기인한 것이다.

2. 성령과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

  기독교의 선교는 인간이 본인의 의지와 결단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하여 지위와 통제를 받는 일이다. 보어(Harry Boer)는 선교사역은 대위 임령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증거 하는 교회가 된다. 이는 어떠한 외부로부터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생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함으로서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사도 바울 속에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즉 그의 개심(9:15-20), 안디옥 에서의 선교사 파송(13:2,4),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의 인도(15:28), 마게도니아 에로의 인도(16:6), 로마에로의 인도(28:25) 등등 수없이 많은 성경의 구절들이 사도 바울과 성령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사도 바울도 그가 써 보낸 편지를 통해서 성령이 신앙생활에 주는 유익한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전 12:1-31). 선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예수를 주이시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a. 바울의 개심 속에 역사한 성령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을 때 그의 눈이 광명한 빛에 의하여 삼일동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9:9). 주님은 아나니아를 시켜 그에게 방문하도록 명령을 내리시고, 아나니아는 바울을 찾아가서 안수할 때에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πλησθς πνεύματος γίου. 9:17)”케 되는 역사와 함께 그의 눈이 다시 보게 되는 사건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추후 바울은 예루살렘의 천부장 앞에서 설교를 통하여 그의 개종 시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22:6-10). 바울은 그가 받은 성령 충만을 통하여 사역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나니아가 손을 얹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울에게 성령의 은사를 획득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였다.

  b. 사도 바울의 선교사 파송 속에 역사한 성령

  성령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는 역사적(歷史的)사건 속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능과 권위로 홀로 그의 교회를 다스리신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성령은 믿는 무리들 가운데서 목회를 위하여 감독을 임명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말하였다(20:28). 개혁신학자 칼빈은 성령이 가라사대(επεν τό πνεμα τό γίον 13:2)...”에 대하 여 주석 하기를

  성직에 임명에 있어서 성령의 권위만으로 충분했으며 그의 지시(imperium)가 그들을 임명하는데(creandis) 있어서 핵심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 이 시라는 추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보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48:16)” 하는 이사야의 말로 확증된다. 더욱이 우리는 이 말에서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한 인격이라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성령 이라는 명칭이 본질적인 실체(hypostasis)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한낱 칭호에 불과하다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조작을 인정할 경우 성령께서 가라사대라는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면서 이방 선교를 감당할 선교사들을 따로 세울 것(φορίζω)을 명령하셨다. 그 후 수없이 많은 선교의 현장에서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c. 예루살렘 종교회의 속에서의 성령

  성령은 예루살렘 종교회의 때에도 역사 하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 1 차 선교여행은 마치고 안디옥교회에 돌아온 후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초대 기독 교회사에 있어서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회의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15:1-29)과 갈라디아서(2:1-10)에 나오며 모임의 동기와 이슈는 할례와 율법에 관한 문제였다. 유대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일단의 사람들이(2:4) 할례가 의(Justification)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의 신학을 창세기 17:4 17:4와 출애굽기 12:48-49 12:48-49과 같은 구절들 속에서 기초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그들의 신앙은 이방 지역에서의 선교에 많은 문제점을 던져 주었다. 따라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할례 받지 않는 디도와 몇몇 증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결과는 예루살렘의 보수적 그룹의 의견을 물리치고, 이방인 선교를 위해 부름 받은 안디옥교회의 대표자들인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을 받아 드린 결정으로 끝났다.

  판결의 요지는 믿음에 있어서 할례의 불필요와 이방인에게는 우상으로 더럽혀진 음식의 삼가와, 음행의 삼가, 그리고 목매어 죽인 짐승과 피를 먹지 말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성령과 우리는(πνεύματι τῷ ἅγίκαί μν 15:28)”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성령님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심을 확증하고 있으며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한 부분의 결정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음을 보게 된다. 또한 안디옥교회에 쓰는 편지의 내용도 성령의 명령에 의하여 쓰인 것이라고 성령의 역할과 권위를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d. 바울에게 유럽선교를 지시하는 성령

  선교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역할은 사역에 있어서 지리적인 경계를 넘는 데에도 구체적으로 관여하시고 지시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 일행이 2차 선교여행 중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유럽지역인 마게도니아로 갈 것을 환상 가운데 보여 주심을 본다(16:6-10).

  락함(Rackham)은 기록하기를 사도행전 16:6-10에서의 성령님이 바울 일행을 마게도니아로 부른 것은 사도행전이 새로운 부분으로 시작되는 구분의 절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여기에서 복음이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를 넘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에의 구체적인 지시가 더욱 흥미를 끌고 있다. 람세이(William M. Ramsay)는 위의 성경구절 속에서 성령의 계시에 대해서 말하기를,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여기에서 언급된 세 차례에 걸친 서로 다른 기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세 가지 다른 방식(성령, 예수의 영, 그리고 환상)으로 나타나 보였다. 그러나 이들 세 차례의 계시가 한가지의 목적으로 귀착되고 있다. 첫 번째의 계시는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금하였고, 다음에는 비두니아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그를 마게도니아로 초청하였다.

  성령의 나타남은 각 사람으로 하여금 유익을 주기 위해서 이다. 특히 누가가 이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사도 바울로부터 명확하고 강력한 성격을 이어받았고,, 그것은 누가의 기억 속에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방 선교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바울에게 세 번씩이나 그의 영으로 계시하여 주심은 선교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