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이해한 교회의 삼위일체적 표상

2020. 6. 24. 21:25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이 이해한 교회의 삼위일체적 표상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세계다문화진흥원 원장)

  아서 웨인 라이트(Arthur Wainwright)는 바울의 저작물들 다수에 그가 자신의 서신서들을 조직하는 구조에서도 나타나는 함축적인 삼위일체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교회를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백성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지역적 소규모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 교회를 이해했다. 성경 속에서 백성(laos)”라는 용어는 종종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옛 율법 가운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의 문제에 관하여 깊게 토의하고 있다. 즉 로마서 9장에서부터 11장까지는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백성의 개념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도 적용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9:24).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laos)에 대한 호칭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1) 성도들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는 성도들(hagioi)” 혹은 거룩함을 입은 자들(hagiasmenoi)”의 단체이다. 바울 서신서에서 교회의 교우들을 가리켜서 성도들이라는 말로 40회가량 불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쓰인 성도들(hagiasmenoi)”은 초자연적인 세계의 선한 모습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오히려 거룩하다 라는 뜻으로 번역함이 옳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이 뜻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거룩함의 근본적인 개념은 구약으로부터 왔으며 신성한 용도를 위하여 분별된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이며(4:5; 27:53) 성전은 거룩한 곳이며(24:15; 6:13) 제단은 그 제단 위에 바쳐진 예물과 마찬가지로 거룩하며(23:19) 율법은 거룩하며(7:12)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며(62:12)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 혹은 성도들이 모인 단체이다.

  하기오스(hagios)는 교회의 개개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단수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용어가 윤리적인 의미보다는 주로 구속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이라고 칭하는 바울의 호칭 속에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거룩한백성이 아니 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거룩할 수 없는 것을 거룩(고전 1:30; 6:11)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성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성도는 세상과 분리되어 담을 쌓고 사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삶의 기준을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나가는 집단임을 말할 수 있다.

2) 신자

  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가 택함을 입은 성도들의 단체라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교회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들의 단체이다(롬 10:9).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고전 1:2)로 구성되며 믿는 자들이라는 용어로 불리 워 질 수 있다(고전 1:21; 14:22; 3:22; 살전 1:7; 살후 2:13).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던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는 흔히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호칭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행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인정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쫓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들로서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된다(4:11f).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 드리는 자들이요, 또 그 말씀이 참되다는 확고한 전제 위에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로마서 9:30-32에 설명하기를 육신을 따른 이스라엘은 그들의 율법 속에서 행위에 의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속에서 저버림을 당한 반면, 이방인들은 믿음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의를 얻었으며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받아들여졌음을 말하고 있다.

3) 형제들

  바울은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가리켜서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16:14, 고전 8:12; 16:20, 고후 11:9, 6:23, 4:15, 살전 5:26). 바클레이는 표현하기를 바울이 편지를 받는 이들을 향해서 가장 흔하게 그리고 사용하기를 가장 좋아한 호칭은 “형제들아 !”라고 말했다.

  형제란 혈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호칭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바울이 사용한 형제들이라는 용어는 영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한 신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서 혈족화 되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형제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위대한 구성원으로 가족화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형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가 내적이나 외적으로 또한 영적이나 육적 투쟁에서 견디고 생존하여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교제는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몸

  바울은 교회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비유하였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그리고 지체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담당할 기능이 주어졌다. 따라서 지체의 어느 한 부분이 병이 들거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몸의 전체가 크나큰 손실을 당하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교회의 구성원들이 전체적인 통일성의 기능 가운데에 자신에게 부여된 신앙생활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로마서 12장을 살펴보면 “...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각각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 곧 예언의 은사, 봉사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위 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 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행할 것을 말한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속에서 이와 같은 은사들이 잘 사용되어 지기를 말하고 있다(고전 12:12-31). 특히 분파들이 심하여(고전 1:10-12; 11:18) 교회의 통일성을 훼손시키는 영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협동심의 토대 위에서 인간의 몸의 지체들처럼 친밀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국가로 살아 나가야 하였다. 결국 교회가 하나의 지체로서의 존립의미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선교적 사명을 교회가 부여받았기 때문이다(4:4).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이 이와 같은 표상을 사용하게 된 배경도 그가 체험했던 그리스도와의 만남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바울의 직접적인 고백인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은 교회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은 임의의 몸 그 자체를 교회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12:5)이나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고전 12:12).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호칭이다. 그는 더 나아가 후기 서신들에 보면 그리스도는 그 몸인 교회의 머리(4:15, 1:18)라고 표현하고 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5:23). 그는 머리 곧, 온 몸이 공급함을 받고 지시를 받으며 연합함을 받게 하시는 몸의 머리가 되신다(2:19). 머리는 몸의 대행자이다.. 몸이란 머리가 없이는 실제적임 면에서 아주 무기력하게 되어버린다.

  이와 같은 표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과 계획들이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때에 방편이 되는 도구요, 대리자요, 무기요,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들은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서 사용되어질 때에 자신을 순종의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의 육체는 선교를 통해서 채워졌다. 그는 수없이 많은 고통(고후 11:23-27) 중에서도 복음증거를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열망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표현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5:22-23, 고후 11:2)라는 표현이다. 교회란 남편과 아내만큼 친밀 한 관계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아내들과 남편들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구주인 것처럼, 남편은 그와 함께 한 육체인 자기 아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2:24). 보호의 극치는 사랑에서 볼 수 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며 조화로운 파트너쉽 이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하셨던 대속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극치점을 나타내어 보여 주신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그러한 사랑 앞에서 존경으로서의 순종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영적인 간음(34:15-16, 31:16, 73:27, 9:1)이 아니라 성육신의 모범을 보이신(2:5-11)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3. 성령의 전

  바울의 삼위일체적인 교회 개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성령의 전 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다. 그는 두 가지 토대 위에서 성령의 전으로서의 내주를 설명한다. 먼저는 집단적인 의미로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17)라는 표현이다. 또한 개인적인 의미로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령은 교회 안에 거하시며 그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게 능력을 주신다. 성령께서 교회를 지휘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안디옥교회의 경우이다. 이는 바나바와 바울의 선택과 파송(13:2)과 선교 후에 사역보고(14:27)를 교회를 통해서 수행하였다.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를 성취해 나간다고 볼 때에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령은 교회의 선교사역을 주관하신다. 초대 교회가 세웠던 일곱 집사의 직분 속에서(행 6:3), 장로들의 직분 임명 속에서(행 20:8),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의 선택 속에서(행 13:2), 이방인들의 교회 입고의 보고(행 14:27)에서도(행14:27) 성령님은 역사하심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둘째는 성령님은 사역자에게 영감으로 말씀을 주신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날 설교했을 때에 넘치게 주셨던 성령의 영감(행 2장)과(행2장) 스데반의 죽음 직전의 지혜의 말씀을(행 6:10)(행6:10) 누구도 감당치 못했으며, 아나니아 와 삽비라의 사건들 속에서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셨다.

  셋째는 성령님은 사역자들의 앞길을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의 인도로 마게도니아로 인도되어(행 16:6-10) 유럽에 복음증거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베드로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행 10장 고넬료의 환상)도 분명하게 인도하셨던 모습을 보게 된다.

  결국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증거 하는 교회가 된다. 이는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명령이 아니라 자생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내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함으로써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