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서신서의 선교적 주제들

2020. 6. 22. 08:26선교학 강의

사도 바울 서신서의 선교적 주제들

조귀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세계다문화진흥원 원장)

1) 이방인의 구원

  바울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선교적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전 1:22-24; 9:21; 1:16; 3:14; 2:11-13; 1-27). 이와 같은 바울의 선교신학은 교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필자는 일관되게 구약의 선교는 구심력적인 선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 의해서 공적으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다(1:6). "모든 이방인 중에서"의 뜻은 유대인이 포함되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칠십 인 역(LXX)에서는 타국이나 외국이라는 말로 쓰였다. 이에 관한 바울의 자기 인식은 본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구절이 되며, 로마서 가운데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된다. 여기에 기록된 중에서"(ν)라는 말은 이방인 중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자"로 바울은 인지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할 책임을 느꼈다(1:14-15). 바울의 이러한 철저한 이방인 구원 사상은 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비롯한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보게 된다.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마음이다. 비록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자신의 선교를 담당하게 하신 중에도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의 관심은 계속 유지되어 왔다.

2) 대속의 죽음과 칭의의 구원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들을 타락한 채로 내어 버려두는 것이었다(1:24-32).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적어도 세 가지 이유를 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함과 (1:18), 둘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함(1:19-20),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오용하는 데에서(1:21-23) 찾는다. 우상숭배와 성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은 불의와 탐욕과 악의(1:29-31)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일본의 신학자 내촌 감삼(內村感三)은 말하기를 인간의 가장 무서운 죄에 대한 형벌은 "그냥 내어 버려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른 형벌이 주어지고, 율법 없는 이방인은 불의로 말미암아 진리를 막는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에 놓이게 될 것이다. 범죄 한 인간에게 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롬 3:23)는 선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한 대속의 죽음과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행위는 바울의 선교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선교는 곧 죄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해 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놓이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죄의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히 단절되고,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게 된다. 선교의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 대안을 가지셔야 했다. 이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되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러한 의는 선교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로서 인간의 믿음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인간에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의롭게 하다"(δικοίω)는 법정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마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를 소유함,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구속이다. 구속(απολυτρωσεωϛ: redemption)이란 말은 대신 갚아준다는 말에서 나왔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의 약속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증이 되었다. 바울은 구속을 이야기하면서 행위가 아닌 믿음을 강조하였다(4:1-8).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므로 의롭다 인정받게 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바울은 세 가지 관점에서 말해주고 있다. 첫째는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둘째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셋째는 율법도 아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의롭다고 인침을 받았는가? 그것은 비록 그가 인간적인 약점이 많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15:6). 선교사역을 담당하는 선교사들에게 흔히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이 있다. 선교사 자신들의 선교 현지에서 생명을 걸고 수많은 일을 하였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선교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된 소식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무런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 생식기능을 상실한 그에게는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17:17).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으며 아들 이삭을 얻었다.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 아래 놓이게 되었고, 사망을 불러왔으며, 죄가 왕 노릇하게 되었다. 만약 선교가 없이 인류를 방치하였다면 인류는 여전히 죄 아래서 탄식하며 이를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 사람 예수가 왔다. 그가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하게 되었다. 한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고, 인류는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최악의 상태를 벗어나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을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선교가 위대하고 인류애를 상한 그의 마음이 크고도 넓은가! 여기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2:16; 21; 3:11).

3) 새생명 예수

  지금까지 필자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에 대해서 법정적인 의미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번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상태 속에 나타난 실천적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이 되었다. 새 생명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곧 성결한 삶이다.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매우 종요하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선교에 있어서 존재의 전도"(presence evangelism)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신자의 존재 자체가 존재는 될 수 없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의 선행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교회가 하는 일의 중요한 요소라고 하였다. 선교에 있어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참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바울은 인간이 비록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서 성결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다.

  성결한 삶은 적어도 세 가지가 동반되어야 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어야 한다. 즉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는 것이다(2:20). 둘째는 헌신의 삶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실제로 헌신된 삶은 통해서 죄가 주장치 못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는 봉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으니, 우리의 지체를 의에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법아래 있지 않음을 증거하고 있다. 결혼의 비유를 통해서(7:1-3), 더 이상 율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관계를 부부 사이의 관계로 표시한 것은 신구약에 익숙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선교 속에서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로 표시되어 있고(62:45; 2:2; 3:1), 신약에서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표시되어 있다( 3:29, 5:22-23, 19:9).

  결국 유법 속에는 성결의 길이 없으며 (7:7-25), 성령의 법만이 새로운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8:1-17).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8:1). 따라서 스페너(Spener)"성서를 하나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8 보석의 반짝이는 첨단이다"라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 안이란 신자의 새로운 거주지이며, 새로운 생활 방식이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형태를 말한다."

4) 선택과 선교의 삶

  하나님은 자존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의 절대 주권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선교의 도구로 삼는 데에서부터 나타난다고 이미 설명하였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유한 특권을 일곱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양자됨(4:22), 하나님의 영광을 지님(16:10; 24:17; 40:34; 왕상 8:11), 언약들을 지녔다(15:18; 삼하 7:12-16; 31:31-34), 율법을 받았다(5:1-22), 성전과 예배, 메시아의 약속(1:1-16; 1:3), 그리고 이스라엘의 혈통을 통해 오신 구세주의 특권이다.

  이러한 특권을 지닌 민족이었지만 초림 하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라고 말했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 가운데 구세주 예수를 보냈지만 그들은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다(53). 그들은 율법과 특권의식 속에서 스스로 넘어짐이 되었다(11:11). 드디어 구원은 이방인에게로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오한 경윤 가운데 이제 보편적인 구원이 도래되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간직할 것을 말하고 있다. 원가지들도 아끼지 않으신 분이 이방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다(11:21).

  이방인들도 이제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비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권적인 경륜이다. 이제 복음이 이스라엘의 벽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법적 제도를 마련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도구로 바울을 부르시고 사용하셨다. 선교사가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세계를 가슴에 담아야할 성서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에게는 흔히 민족복음화를 도외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갈등의식도 있다. 어 떤 의미에서 서기 2000년을 지나면서 들어오면서 한국교회도 교인들이 매년 10% 이상이 줄어 간다는 안타까운 통계를 접할 때도 있다. 이방선교만 집중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문척 곤욕스러운 짐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을 담당할 일꾼들은 일반 교회의 사역에 중점을 둔다면 선교사는 이방인 사역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 로마서를 보면 11장까지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밝혔고, 교리에 입각한 실천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전편에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내용은 사랑(12:9-13; 13:8-10; 14:13-23)이다. 사랑이 없이는 선교가 되지 못한다. 해외선교에 있어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문화 속에서 피부 색깔이 다르고 생활하는 삶의 양식이 다른 선교지의 사람들을 주님 앞에 인도할 때에 사랑이 없으면 선교란 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ον) 라는 접속사를 썼다. 이것을 바로 앞선 절과 연결하는 이도 있으나(Meyer), 교리 전체를 받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Alford, Godet, Denny).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모든 사항들을 잘 알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알고 있는 것에만 안주하지 말고 이제는 변화하라고 강조한다. 변화가 없는 것은 선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선교지를 조사해 보면 수없이 많은 토속종교들이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하나의 종교적 규범을 가지고 사회악을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조혼제도나, 한국의 조상숭배를 통한 제사 문제,, 일본의 신사 참배 등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 일들이 만핟.. 이러한 잘못된 제도들 속에서 바울은 분명한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바울은 변화의 징표로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12:1)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선교적 삶이 아니고는 감당치 못한다. 제사란 레위기의 제사법이 말해주듯이 제물을 (양이나 소나 비둘기 등) 잡아서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선교사는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단번에 순교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산제 사라는 것이다. 산제사 속에는 인간의 자기 부정이 포함된다. 선교사는 이 세상에서의 대접받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소가 그의 생존시 까지 밭을 갈며 일을 하다가 살과 뼈, 그리고 가죽가지 인간에게 주는 것처럼 선교사란 선교지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이다.

5)고난과 소망

  그리스도의 일꾼은 고난을 받을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고후 11:23-27; 1:12-13; 1:24; 살후 1:5; 딤후 2:3-11; 9).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서 말하기를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은 데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바울은 자신 속에서 승리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드러내 보이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고난과 죽음 속에서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드러내기를 원했던 것처럼(13:31), 자신의 고난과 약함을 자랑하였다(6:4).

  고난에 대한 바울의 체험은 유대주의자들이 가르친 내용과는 반대된다. 유대주의자들은 사람이 평안한 환경에 살게 됨과 육신의 안락을 누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증표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사역자가 그 사명의 실행을 위하여 고난을 받음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 된 증거라고 본 것이다. 사실 선교와 순교는 동의어 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이 체험한 고난이 단순한 고생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소망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영생에 있다. 바울 이래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자신들의 무덤조차도 간직하지 못한 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유명을 달리했다. 바울은 이제 이와 같은 헌신된 선교 사역자들의 장래가 허망함이 아닌 면류관이 기다리는 영존의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없으며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행 한자로다(고전(고전 15:17-20). 바울 서신의 면면을 살펴보면 소망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수없이 많이 담겨 있다(살전 4:13-18; 5:9-10; 딤후 4:8; 딛 2:13).

  지금까지 필자는 바울이 쓴 서신서가 선교적인 내용들을 확실히 담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바울 서신서의 가장 중요한 선교적 역할을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 서신서가 성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바울의 서신서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교리는 물론 믿는 자의 실천적 삶의 방향은 물론 아무런 선교적인 삶의 지침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