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9. 10:56ㆍ선교칼럼
상생(相生)과 선교
조귀삼(한세대 교수, 세계로 선교연구원 원장)
필자가 지난 95년부터 방학을 맞이하여 선교 훈련생들을 모집하여 훈련 장소인 필리핀 바기오의 침례회 신학대학(Philippine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Baguio)에서 선교훈련을 지금껏 시켜오고 있다. 훈련 내용은 선교영어와 선교학 그리고 문화체험을 시키고 있다.
특히 문화체험은 타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훈련과정이 된다. 에드워드 타이러(Edward Tylor)에 의하면, 문화란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에 의해서 획득된 지식, 믿음, 예술, 도덕, 법률, 다른 역량들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전체(complex whole)“라고 말했다. 따라서 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것도 복합적으로 얽힌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 체험 가운데 에서 꼭 가보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기오 박물관이다. 박물관 이라고 해봐야 100100여 평 남짓한 곳에 자신들이 사용했던 농기구, 비옷, 옷감, 그리고 미이라화 된 사람의 시신이 전부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보잘것이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그곳을 찾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박물관 입구에 있는 크나큰 그림 때문이다. 그 그림은 그곳 지방의 생활상을 그린 것인데 여인들은 밥을 짓고,, 남자들은 닭을 잡아서 잔치를 준비하는 듯한 그림이다.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 그곳의 단순한 생활상을 그린 그림으로 알았던 필자는 머리가 아주 허연 박물관장인 할머니의 설명이 진행될수록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그곳 북부 지방의 부족 간에 심한 갈등은 항상 다른 부족을 침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죽는 분쟁이 지속된 지역이었다. 사회는 살벌하고, 가장을 잃은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참한 생활들이 되풀이되었다.. 세대가 흐르던 어느 날“평화의 회담”이 양쪽 부족 간에 열리게 되었고, 며칠 밤낮을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여 작음 문제들부터 실마리를 풀 듯이 풀게 되어 결국 화목를 이루어 내었고, 그 결과 양쪽 부족 간의 모든 남녀노소가 나와서 찬치를 통해서 부족간의 통합을 이루어 내었다는 그림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생의 삶”이다.
우리의 언어 가운데에 상생(相生)이라는 어휘가 있다. 이는 서로의 삶을 위해서 협력을 하자는 것이다. 상생의 의미는 동양 문화의 원류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즉 음양오행설에서 우주, 역사, 인간의 기본 요소인 다섯 힘(火, 木, 水, 金土)(火,木,水,金土) 사이의 연쇄 고리 중에서 한 조합을 말한다. 이러한 상생은 다음과 같은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상생은 사물 사이의 기본 관계가 각자 자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관계성 내에 존재한 것이 그렇듯이, 한 요소는 그 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데에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셋째는, 따라서 상생은 신비적인 요소를 또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종합해 보면 “자신의 것을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 다른 것도 또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필자는 동양사상의 모든 원리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갈등이 많은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어느 때 보다도 상생이라는 말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상생의 방법은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상생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 구속의 역사 속에 나타난다. 아담의 범죄는 죄의 전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처참한 상황 가운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어 이 땅 위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와 같은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상극적인 상황을 상생으로 바꾸어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셨다.. 이제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된 존재가 되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상극에서 상생의 십자가를 지셨다.
상생의 삶은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에 적용해야 할 중요한 지침이다. 여당과 야당의 갈등에서, 노동자와 사측의 갈등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에서, 대형교회와 개척교회의 갈등에서, 목사와 장로의 갈등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에서, 이제 상생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2002년 11월 “교회연합신문” 토요 시평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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