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축제

2020. 3. 19. 11:01선교칼럼

선교 축제

조귀삼(한세대 교수, 세계로 선교연구원 원장)

   필자가 선교학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대학에서 며칠 전 선교 축제(Mission Festival)이 있었다. 이 축제의 시작은 약 88년 전에 몇 명의 학생들이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운동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기도하던 학생들도 이제는 목회와 선교 일선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다. 이러한 순박한 역사를 지닌 선교 축제가 이젠 선교학 전공자들의 축제로 승화 되었다.

   축제를 준비한 학생들은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김밥도 사 오고,, 빵도 사 오고,, 음료수도 사 와서 그럴듯한 잔 찻상 같이 꾸며놓고 축제를 벌리는 것이었다. 축제가 시작되고, 복음성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남미 어느 지역의 도시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서 복음을 확산시키다가 순교한 목사님의 일대기를 비디오로 비쳐주어 함께 모여있는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필자는 이 축제 속에 담긴 열정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선교의 동역화가 필요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일찍 늙어버린 교회라고 표현한 말을 들었다. 이런 평가는 아마도 벌써 애 할아버지가 되어버려, 무사안일과 함께 교회의 세습을 꿈꾸는 낡은 사고들 속에서는 새로운 것들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본다.

   그러나 젊음이 넘치는 선교 축제를 보면서 희망을 느껴본다. 19세기에 미국에서는 젊은 기도의 일꾼들이 선교의 강줄기를 바꾸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그룹이 유명한 건초더미 그룹(The haystack Group)” 이었다. 사무엘 밀즈(Samuel G.Mills)라는 소년이 1802년 어느 날 코네티컷주의 그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게 된다. 밀즈는 4 년 후 윌리암스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에 형제단(Socie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려지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제임스 리처드,, 프란시스 로빈스, 하비 루미스, 고든 홀, 루터 라이즈 등등)을 만나게 된다. 하루는 이들과 학교 근처의 숲 속에서 기도하던 중에 천둥 번개가 요동하게 되었다.. 소나기를 피하여 근처 건초더미 밑에 대피한 그들은 세계선교를 위하여 기도하던 중 만약 우리가 뜻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미국 최초의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서약을 하였다.

   이들의 선교에의 헌신은 1808년에 졸업생들 몇 명이 앤도버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앤도버 신학교는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와 요나단 네드 워드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가진 학교로서 후일 해외 기독교 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브라운 대학의 아도니람 저스든(Adoniram Judson)과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뉴엘(Samuel Newell), 유니온 대학의 사무엘 노트 주니어(Samuel Not, Jr)와 합류하게 된다. 저드슨의 지도아래 그들은 선교 주제 연구회(Society of Inquiry on the Subject of Missions)를 조직하였다.

   1810628일 저드슨, 밀즈, 뉴엘은 매사추세츠 회중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청원서를 보낸다. 1810955명이 참석한 가운데 코네티컷의 파밍턴(Farmington)에서 최초의 연례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14개 조항의 법규를 토의 결정하였다. 이것이 미국 해외 선교운동의 소박한 시작이 되었는데 오늘날 전 세계 신교 세력 선교사의 70%와 재정의 80%를 거의 공급하고 있다.

   한편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보내기로 협의 한것이 둘째 연례회의 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저드슨, 노트, 뉴엘, (Hall)등 네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선교사로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선교지로 떠날 때쯤 인원이 추가되어서 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81226일 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2 주 후 저드슨 가족은 살렘을 떠나서 출발하였고 다른 일행은 224일 필라델피아를 떠나서 인도까지 도착하는데는 약 4개월이 소요하였다.

   한편 저드슨은 회중교회를 사임하고 침례교회에 입적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18145월 오늘날의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부를 발족한 계기가 되어다. 저드슨은 이 기구에 의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인도에서의 동인도 회사의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미얀마의 랭군(Rangoon)으로 떠나 1813713일 그곳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제 이들처럼 젊은 선교운동들이 일어나야 한다. 더 이상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세계의 부름에 당당히 나가는 젊은 선교의 일꾼들이 일어나야 하겠다. 자 이제 우리함께 세계를 변화시킬선교축제를 즐겨 보자.

2002교회연합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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