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1. 15:19ㆍ선교칼럼
채플거부 운동과 학원선교
조귀삼 목사(한세대 선교학 교수)
참여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 각 계층별로 다양한 목소리가 나타나게 됨을 볼 수 있다. 과천의 정부청사 앞에는 날마다 일인시위가 끊일 날이 없다. 이러한 자기표현은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기독교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채플거부 운동과 고등학생 한 사람이 전통적 기독교 사학과 벌리고 있는 “채풀”논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학생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종교를 갖는 자유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는 것이다. 즉 채플 같은 제도를 통해서 기독교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들에게 “기독교 사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채풀이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무용한 것인가?”라고 질문하고 싶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성을 나누는 대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대학은 기독교의 바탕위에서 세워졌다. 오늘날 대학을 지칭하는 말인 University는 라틴어인 “universitas"에서 유래되었다. 이 용어의 뜻은 ‘길드’ 또는 ‘조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의 수도원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수도원의 신앙수행과정은 기도, 명상, 노동, 학문연구를 커리큐럼화 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화된 성당에서 젊은이들을 흡수하여 교육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성당의 교육과정이 입학을 하게 되면 일곱 가지의 기초과목인 자유 학예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즉 문법, 수사학, 논리학, 기하, 산수, 천문학, 음악이었다. 이러한 과목이 끝나면 시편집, 전례서, 교회법, 성가등의 신학 관련 교육이 가르쳐졌다.
대학은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사이에 도시민들의 욕구가 분출되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십자군 운동으로 동서양의 교류가 발달하면서 상공업과 농업생산성의 향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요구가 상승하게 되었다. 최초의 유럽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세워진 볼로냐대학이었다. 볼로냐 대학은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후에 의학이 생기고 1360년에는 신학부가 설립되게 되었다.
결국 필자의 논지는 대학이란 기독교와 분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은 기독교의 선교와 관계가 없는 곳이 거의 없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살신성인의 자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육 체계를 얻기란 참으로 불가능하다. 그들 선교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헌금한 성도들의 마음을 교육의 그릇에 담아서 학교들을 설립했다.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학교의 교육을 통해서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 되어 지기를 소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학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발시키는 근저에는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마음이 있음을 학생들은 알아야 하겠다.
필자는 채플거부운동을 공론화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행동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아프카니스탄의 여성들의 교육문제에 대한 다큐가 방송의 화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였다.. 탈레반 정권 이래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 여성들의 한 맺힌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교육을 통해서 남녀평등과 무지를 몰아내었다. 대학은 지성을 탐구하는 곳이다. 그리고 모든 지성의 정점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 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지성이 되어야 하겠다.
2004년 10월 7일, 국민일보 “조귀삼 교수의 선교 이야기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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