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의 선교지도자인 페스토 키벤제레

2020. 4. 7. 12:18선교칼럼

우간다의 선교지도자인 페스토 키벤제레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페스토 키벤제레(Festo Kivengere)는 우간다의 키 제지(Kigezi)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였다. 10살 이 된 어느 날 아프리카인 복음 전도자가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부터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자신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음에 대한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몇 년 후에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의탁하게 되었다.

  페스토는 성장해 가는 시기에 아프리카에 부흥의 불길이 불기 시작하였다. 우간다의 국경을 넘어서 케냐, 탄자니아, 자이레 등의 이웃 나라로 확산되어 갔다. 그는 전도대원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후 5년 동안 마을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지만 구령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195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페스토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발전하였다.. 오스트리아에 전도여행을 다녀온 다음에 빌리 그래함의 통역자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났고 수천명의 군중이 모인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그는 빌리그래함 전도단과 비슷한 성격의 아프리카 전도단(African Enterprise)을 배후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페스토의 교단은 성공회였다.. 이들의 신앙은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제도적이며 이성적이었다.. 따라서 동료 사역자들로부터 많은 견제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성공회 사역자들은 쉽게 사람들을 회개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형식적인 예배와 무미건조한 교리의 수호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역자들을 향해서 페스토는 말하기를 무슨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남다른 열심과 과도할 정도의 큰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꿈이나, 환상, 죄 사함에 대한 확신, 기적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우리를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것은 없다

  페스토가 자신의 고향인 키 제이 주교로 임명을 받기 2년 전인 19711월 우간다에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 두려움과 공포의 이미 아민이었다.. 우간다는 이디 아민으로 말미암아 공포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군사 정부는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비난을 가하는 집단과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아민의 집권 기간 중에 자행된 대부분의 정치 폭력은 주로 기독교인들에게 가해 졌다. 전직자들은 폭언은 물론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의 탄압은 페스토는 물론 가족에게도 가해졌다. 그의 딸인 채리티(Charity)200명이 넘은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군인들에 끌려가서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페스토는 다른 주교의 취임식 설교를 부탁받게 되었다. 3만여 명의 군중들은 페스토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페스토는 마음속에 간직한 비통한 마음을 설교화 하였다. 정부 관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공포와 처형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분 관리들은 대부분 너무 많은 폭력을 써서 여러분의 권력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 만약 여러분이 권위를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디 아민의 정부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페스토는 조국을 떠나기로 하였다. 1977219일 밤 그의 아내 메라와 함께 우간다의 국경을 넘어서 르완다로 망명하였다.. 한밤중에 국경을 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산비탈을 한밤중에 몇 시간을 걸어서 성공하였다.

  페스토의 탈출 소식은 우간다의 기독교인들과 전 세계에 퍼졌다. 그는 곧 우간다 정부를 비판하는 망명객이 되었다. 2년을 그렇게 지낸 후에 이디 아민의 축출 이후에 귀국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공항에 나와서 그를 환영하였다. 아민이 집권하였던 8년 동안에 50만 명이 희생되었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다.

  페스토는 귀국 후에 영적인 사역에 힘썼다. 19822월 귀국 3년 후에 우간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부흥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1981년에는 그의 교구에서만 14명 의 사제들이 임명되었다.. 미카엘 캐시디는 이디 아민의 정권 아래서도 우간다 교회는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성장하고 강화된 유일한 조직체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우간다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2014525교회연합신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