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7. 13:13ㆍ선교칼럼
교황보다 더 높은 예수님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며칠 동안 한국의 모든 매스컴에서 들을 수 있었던 “비바 파파”의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 한국 땅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오신 이후에 개신교는 주눅이 들 정도로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국내의 어수선하고, 무엇인가 풀리지 않고, 언어는 있으나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반전 시키는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데일리의 허영섭 기자는 교황의 방한 성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제 명동성당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의 미사’ 집전을 마지막으로 방한 행사를 모두 마무리하고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비록 4박5일에 걸친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아낌없는 사랑과 위로의 손길로 우리 국민들을 쓰다듬어 주었다. 방한 기간 중에 열린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와 솔뫼성지 방문, 광화문 124위 시복식,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 등의 행사가 한결같이 벅찬 감격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런 때문일 것이다. 행사장마다 연호되던 ‘비바 파파’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낮은 곳에서 몸소 섬기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실천의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전세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스스로 몸을 낮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울림이었다. 장애아동에게 입맞춤하며 강복했는가 하면 새터민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남다른 관심을 나타냈다. 그 자신 방탄차를 사양하고 국산 소형차를 이용했으며, 일반 승객들이 탑승한 KTX 이용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 자연환경의 파괴 등이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와 협력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는 단순히 상처를 보듬는 차원을 넘어 다시는 그런 어이없는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심의 표명이었다. 어제 명동성당 미사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까지 두루 초청한 데서도 우리 사회에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하게 감지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나간 상황에서 이제 우리 스스로 남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무를 떠안게 됐다. 교황으로부터 받은 화해와 위로의 메시지를 씨앗으로 삼아 사회를 더 밝고 명랑하게 만드는 데 서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종교계는 물론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일반 국민들도 위로를 받기만 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먼저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자세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허영섭 기자가 분석한 이러한 평가는 충분히 들을 만 가치가 있는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와 함께 등장한 유사 기독교의 행태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정말 신선하게 비쳤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비바 파파”라고 외치는 현상 속에 사랑과 복음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어쩌면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교황 자신이 가로챈 것은 아닌가? 이러한 나의 생각은 “비바 파파” 소리는 수없이 들었지만 “비바 예수”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님이 언급하신 어록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찬양하거나 복음을 증거 하는 언어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평화”라던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돕자”든지 하는 용어는 봇물을 이루지만 생명의 주님을 증거 하는 용어는 듣지 못했다. 여기에서 교황의 역할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존립 목적은 선교에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선교를 포함한 중세 시대의 선교사들이 공히 가진 역할이었다. 심지어 중세시대를 대표하였던 가톨릭의 네 선교단체인, 프란시스, 도미니크, 어거스틴, 예수회의 모든 선교들이 예수 영광을 선교의 도구로 삼았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선교적 역할이다. 즉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님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이 왜 이시대의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야 하는지 드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정종의 역할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2014년 8월 24일 “교회연합신문 선교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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