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대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2020. 8. 11. 10:55선교학 강의

선교대회와 에큐메니칼 운동

조 귀 삼 박사(전 한세대 교수, 현 세계다문화진흥원 원장)

  선교대회는 선교신학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1860년 영국의 리버풀 대회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크고 작은 선교 대회들이 선교 신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교대회는 자동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이어졌다. 에큐메니칼이란 용어는 "우주, 사람이 거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οίκουμένη"에서 파생된 것으로 신약 성경에 15회 정도 나온다. 이는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교회회의(Church Council)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사도신경에도 나타나는데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10년의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에큐메니칼 교회 운동을 만들어내면서부터 선교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교대회는 1910년에 있었던 에딘버러(Edinburgh) 대회라고 말한다. 에큐메니칼적인 입장에서 보면 에딘버러 대회는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부터 칼케돈 회의(451)에 이르는 종교회의들과 비교될 수 있는 세계사의 중요한 맥락이 되었으며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종교회의의 시대를 열었다"라고 평가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1910년의 에든버러 선교대회 이전에 세 번의 선교 대회가 있었다. , 리버풀 선교대회(1860), 런던 선교 대회(1888), 그리고 뉴욕 선교대회(1900)가 그것이다.

  호그(W. Richey Hogg)에 의하면, 에딘버러 선교 대회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도, 중국, 일본, 남아프리카, 멕시코에서의 상호 협력적인 "선교지" 회의들이 중대하게 된 것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영국과 아메리카에서 보였던 일련의 모임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선교 상호 협력을 위한 "가정 모임들"이 계속적으로 성장하면서 발생하였다. 넷째는 당시 국제 기독교 학생 운동이 이룩한 모든 결과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호그의. 이론은 선교사적인 관점에서의 표현이라고 본다.

  에딘버러의 선교대회가 개최된 1910년의 영적 세계는 선교신학의 새로운 이해가 나타난 분기점의 시기였다.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liberalism)가 소개되어지고 영향력들이 교회에 미치게 됨과 아울러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점차로 큰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더 나아가 성경의 문서 비평이 시작되면서 성경의 권위가 점차 위축되었다. 따라서 에딘버그 1910년의 선교대회는 시류에 의한 다양한 신학적 사고들이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아더 죤스톤은 이 대회가 선교에서 과정신학과 혼합주의에 문호를 개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에딘버러의 대회는 다음과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먼저 1,200여 명의 대표들이 공식 인사로 참가하였으며, 아시아에서는 17개국만이 참석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서구인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학자들과, 신학자들, 선교사들, 교육자들이었다. 신학적인 면에서는 신학적인 제한성들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위도 제한하였다.

  에딘버러 대회는 "신학적"인 대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신학적인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첫째는 선교 신학의 결속은 실제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인정된 것이다. 이 대회의 특 별 기고는 선교를 알리는 풀러(fuller)의 신학을 반영하였다. 그의 주장은 세계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성령은 위대한 선교사이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과 성령만이 인간을 수단으로 하여 선교에 능력을 불어 넣으신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 타 종교들과 복음의 관계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에딘버러 문서인 비기독교 종교에 관련한 선교 메시지"에서는 거의 200여 통의 편지들이 세계에 보내져 많은 자료들과 성찰들이 수집되었다. 타종교에 관한 선교사의 자세는 진정한 이해 속에 자비로써 받아들일 것과 기독교 신앙의 보편화를 강조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선교 현장에서의 교회"는 많은 주의를 요망하였으며 상호 협력과 일치를 촉진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견해들이 보여주듯이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자유주의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둘 다 공히 선교를 돌아보는 계기의 대회였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에딘버러 대회 이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에딘버그 대회 때까지만 하더라도 복음 선교의 순수성을 간직하였지만 그 후 연합 운동 과정 가운데에서 선교신학의 이해도가 달라졌다. 즉 복음이냐? 아니면 사회봉사냐?의 두 갈래 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과 사회적인 관점이 달라지므로 인간의 삶의 상황 속에서도 변화들이 나타났다. 에딘버러 대회의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는 많은 부분에서 혁명적인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그 당시는 서구 정치적인 세력들의 몰락, 막스와 레닌의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의 대두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들 가운데 대망의 사상이 일어나고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사상, 과학, 지식의 팽창, 우주관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의사 전달 발전과 우주 탐험 등으로 지구촌 속에서 많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충격들 속에서 선교 신학의 지각변동도 충격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에든버러 대회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교회의 선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변화들이 후일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을 태동케 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에딘버러 에큐메니칼 운동은 다양한 신학들이 교회 모임 속으로 들어온 결과 1960년대를 지나면서 영혼구원의 선교적 본질이 훼손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