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6. 14:30ㆍ선교칼럼
성스러운 지혜가 주는 선교의 교훈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성 소피아(성스러운 지혜) 성당은) 콘스탄틴 황제(콘스탄티누스 I세)의 로마제국의 접수와 함께 시작된다. 로마를 접수한 콘스탄틴은 AD 330년 수도를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리도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AD 360년에 콘스탄틴 I 세 황제에 의해서 거대한 목조 건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AD 404년 6월 20일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서 성당이 불에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특명에 따라서 루 피노스라는 건축가에 의해서 404에 시작하여 416년까지 첫 번째 교회의 터 위에 건축하고 416년 10월 6일 헌당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 532년 1월 13일에 시작된 니카 혁명기간 동안에 반란군들에 의해서 또다시 파괴되었다.. 니카 혁명을 진압한 주스 티니안 황제는 현재의 교회를 두 번째 교회가 있던 같은 장소에 건축하였다.. 그리고 건축은 당대에 유명한 건축가인 트랄레스 출신의 수학자 안 테미 우스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에게 맡겼다. 교회는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에 의해서 5년 동안 공사를 한 후에 완성이 되었다.
AD 726년에는 당시 교회에서는 우상타파의 신앙들이 팽배하면서 교회 속에 화려하게 장식된 모자이크들이 파괴되었으나AD 843년에 우상타파의 시대가 끝났을 때에 성화가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1204년에 제 4차 십자군 원정대들이 이곳에 와서 교회 내의 모든 보물들이 약탈당함과 아울러 금 바탕의 모자이크들이 파괴당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성스러운 지혜의 집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이슬람을 국시로 하고 정복의 길을 달렸던 오스탄 터키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에는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정복 왕 술탄 마흐렛은 이 도시를 점령한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최초로 이 성 소피아 성당에서 이슬람의 금요 기도를 드림과 아울러 기도처로 삼아버렸다. 지금도 성당안을 순례하다 보면 건축물의 구조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이슬람의 종교 의식에 따라서 미흐랍(성지( 메카를 향해서 만들어진 움푹 들어간 곳)을 향해서 교회 건물의 일부를 훼손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당 밖에는 무슬림의 상징인 첨탑을 세우고 12개의 방이 있는 무슬림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여다. 그리고 내부에 있는 모든 기독교적 모자이크들을 얇은 석회석으로 덮였으며 벽면 위의 십자가는 제거되었다..
이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튜르크의 명령으로 대규모의 복구공사와 함께 무슬림들의 파괴로 인한 모자이크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5년에 박물관으로 만들면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지금은 성당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터키 공화국의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필자는 이 영욕의 거대한 건물을 둘러보면서 기독교의 흥망성쇠의 모든 역사를 안고 서있는 성당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감회를 느꼈다. 만약 하나님이 주신 선교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때에 한국의 교회 건물들은 성 소피아 성당처럼 찬바람만 날리고 박물관의 유물 전시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3년 11월 “교회연합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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