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6. 14:45ㆍ선교칼럼
일곱 교회의 메시지가 주는 선교적 의미
조귀삼 교수(한세대 선교학)
몇 주 전부터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를 계속해서 칼럼을 써왔다. 그동안 지엽적인 부분들만 소개해 왔는데 오늘은 종합적인 의미에서 글을 쓰고자 한다.. 초대 일곱 교회의 소개는 요한 계시록 2장과 3장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일곱 교회의 기록 목적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본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은 일곱 교회를 평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즉 편지마다 칭찬(라오디아교회는 제외)과 책망(서머나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제외)과 권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곱 교회에 공히 주신 말씀은 “그들의 행위를 안다”라고 언급하시고 있다.
필자는 일곱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게 일곱 교회가 주는 선교적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로 함축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를 사랑하라”이다. 먼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이다. 헬라어의 어순에 의한 해석은 “너의 처음 사랑, 바로 그것을 버렸다”이다. 여기서 사용하신 단어“아가펜”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말할 때에 쓰는 단어이다.. 교회를 처음 출석했을 때는 사랑의 쇼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볼 것 못 볼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실망감 속에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완벽한 교회는 없다. 즉 완전을 지향해 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특히 현대에는 “포스트 모던”적인 사상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목사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가 갖고 있는 고유의 권한까지 심각하게 침해받는 상황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결코 우리는 첫사랑의 모체인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회개하라”이다.회개 하라”이다 “우리의 행위”를 아는 주님의 명령은 “회개하라” 이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회개는 “분명한 영적 싸움을 하지 않는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다음은 요사스러운 이세벨을 용납하여 “행음”하게 함을 말씀하고 있다. 윤리만이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윤리가 존재할 때에 기독교는 복음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라”이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모진 어려움과 박해를 믿음으로 이겼다. 그러나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자랑한 교회는 성령님이 떠나 버린 교회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둘러보면서 가장 한심한 것은 바로 성령님이 떠나버린 땅이 얼마나 황무한가에 대한 소감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의 터는 엉겅퀴만 가득하였다. 결코 우리는 “성령님의 역동성”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필자는 이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은 요구만 하시지는 않는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의 선물을 주신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서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면할 때에 우리에게는 가장 무서운 책망이 따를 것이다. 그것은 “촛대를 옮겨 버린다”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2003년 9월 “교회와 연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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