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6. 14:50ㆍ선교칼럼
제2의 Faith Mission을 기대하며...
조귀삼 목사(한세대 선교학 교수)
신앙 선교라는 칭호는 선교단체들의 재정조달 방식에서 시작되었다. 즉 선교사들은 어떠한 급료를 선교부로부터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교부가 일정한 수입이 없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기도하면서 믿음 가운데에서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 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앙 선교의 성경적 근거는 바울의 사역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사역의 대부분을 자족하면서 감당하였다. 안디옥 교회에서의 사역비가 도착하지 않을 때에는 ‘텐트 메이커’로서 자급하면서 선교사역을 진행하였다. 바울의 고백은 삶에 있어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세의 수도사들도 신앙 선교의 모범 사역자들이었다. 수도원을 나와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문전걸식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에 의해서 선교사(Mitteo)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1865년 중국의 내지선교회를 창설했던 허드슨 테일러나, 장로교 목사였다가 자신의 선교 신념에 따라서 C&MA를 창설하여 세계선교를 감당했던 A.B. Simpson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신앙 선교의 행동가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앙선교를 지향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다. CCC 같은 선교단체는 사역자들이 모금을 하면서 캠퍼스와 해외사역들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일정한 후원자가 없기 때문에 교회나 친지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활비와 사역비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신앙선교의 행동이 쉬운 사역은 아니다. 문전박대는 일수 이고, 심지어 따가운 눈총과 심한 배척을 감수하여야 한다.
이들 신앙 선교 운동가들에게는 공통적인 믿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교 명령 앞에서 절대 순종함으로 자신의 사역을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이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행동의 사람들이었다. 사색과 관념적인 사람들이 갖는 약점을 극복하면서 선교지로 뛰어 달려간 용기 있는 행동가 들이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옹고집적인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21세기의 선교를 위해서 다시 한번 이러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부흥주의와 물량주의 속에서 영적으로 너무나 허약해졌다.. 영적 사관학교인 신학교는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을 상실할 위기에 있다. 소수의 영적 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세적 낙관주의와 관념주의 속에서 하나님의 학문은 사회적 인문주의로 탈바꿈해 버렸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신앙 선교의 정신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러한 신앙선교의 정신만 회복할 수 있다면 세계를 영적 제자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가두어 가기 전에 정신을 다시 한번 차려야 할 때이다.
2004년 2월 “교회와 연합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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