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6. 14:57ㆍ선교칼럼
자살과 왕따
조귀삼 목사(한세대 선교학 교수)
참으로 못된 풍조가 사회적 전반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인격 파괴이다.. 인간의 인격을 파괴하는 작업이야 말로 사단의 전략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악독은 사회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오늘도 인간성의 말살을 꾀하고 있다. 최근의 사회상은 참으로 비참하다. 오늘 아침 신문의 기사를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중학생들이 제작한 `왕따 동영상'파문이다. 경남 창원시에서 지난 11일 졸업을 하루 앞둔 3학년생 C군 등이 친구인 J군을 카메라폰으로 괴롭히는 장면을 자랑삼아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고 이를 한 네티즌이 다른 인터넷사이트에 올리면서 언론을 통해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사실 왕따 만큼 괴로운 마음은 없다. 공동체 속에서 소외되는 심리적 상태는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필자의 초등학교시절, 잘못 먹은 나무의 열매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다. 나무의 열매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모습을 본 친구가 우습다는 듯이 깔깔대기 시작하였다. 당황한 나는 더 빨리 열매를 삼켜 버리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목에 걸린 열매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사소한 그 일 때문에 나는 ““고롱 씨”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친구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에 입은 상처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치명적인 경험이었다.
왕따 동영상의 파문은 방송을 비롯한 언론에 카메라폰에 찍힌 동영상 사건이 공개되면서 해당 학교의담임교사와 교장이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 당국의 끈질긴 조사는 40년이상 교육 외길을 걸어온 해당 학교장의 자부심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게 되었다고 한다. 자살하신 윤 교장은 정년을 2년여 남기고 지난 20일 도교육청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왕따 동영상의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고 했다. B중학교 관계자와 유족들도 "이번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왔고 특히 지난 20일 수업시간에 동영상이 촬영됐다는 보도에 굉장히 힘들어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윤 교장이 이때부터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갖게 했다. 실제 윤 교장이 자살한 뒤 발견됐다는 메모에는 "괴롭다. 수습을 해야 할 텐데..." 등의 내용이 적혀 있어 윤 교장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이 같은 윤 교장의 죽음에 대해 유족들은 "이런 일로 교육자가 죽어야 하나"며 "반드시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한다"라고 오열, 왕따 없는 교육현장을 조성하지 못한 우리나라 교육풍토에 새삼 경종을 울렸다. 이상의 내용들은 문명의 이기인 인터넷신문에 쓰인 내용을 인용하였다. 윤 교장의 자살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자살을 요즈음 보게 된다. 아파트에서 자녀들을 차례로 던져서 죽게 하고, 마지막은 자신도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어머니 있고,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달려오는 전철에 몸을 던져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삶에 지쳐버린 그들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차라리 숨을 거두는 것이 고통을 잊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극단적인 인간 행동이다.. 비록 학생의 일로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해도 생명의 처분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경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살상했을 때에 공의의 심판을 내리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는 왕따도 자살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자신만이 나라를 구하고 사회를 구하고, 영혼을 구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외침은 사회구조악의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한다. 즉 인간 누고도 왕따가 없고, 자살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논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삶의 모든 것들을 양도해야 하는 당위성이 성립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따도 없고, 자살도 없는 신천신지의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마지막 구절은 “아멘, 주 예수여어서오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2004년 3월 “교회와 연합신문 토요 시평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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