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Chapel)거부 운동과 학원선교

2020. 3. 27. 10:26선교칼럼

채플(Chapel) 거부 운동과 학원선교

조귀삼 목사(한세대 선교학 교수)

  최근에 일부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채플거부 운동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학생이 주장하는 논리는 종교를 갖는 자유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는 것이다. 즉 채플 같은 제도를 통해서 기독교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가 다원화되고 학원 민주화를 부르짖는 세태이긴 하지만 필자의 마음은 무거운 바윗덩어리로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냐하면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가 기독교 채플을 제도화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기독교의 바탕위에서 세워졌다. 오늘날 대학을 지칭하는 말인 University는 라틴어인 universitas"에서 유래되었다. 이 용어의 뜻은 길드또는 조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학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세의 수도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도원의 신앙수행과정은 기도, 명상, 노동, 학문연구를 커리규럼화 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화되고 성당에서 젊은이들을 흡수하여 교육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성당의 교육과정이 입학을 하게 되면 일곱 가지의 기초과목인 자유 학예를 먼저 배우게 되었다. 즉 문법, 수사학, 논리학, 기하, 산수, 천문학, 음악이었다. 이러한 과목이 끝나면 시편집, 전례서, 교회법, 성가등의 신학 관련 교육이 행해졌다.

  대학은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사이에 도시민들의 욕구가 분출되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십자군 운동으로 동서양의 교류가 발달하면서 상공업과 농업생산성의 향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 요구가 상승하게 되었다. 최초의 유럽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세워진 볼로냐대학이었다. 볼로냐 대학은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후에 의학이 생기고 1360년에는 신학부가 설립되게 되었다.

  결국 필자의 논지는 대학이란 기독교와 분리할 수 없는 곳임이 증명되었다.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은 기독교의 선교와 관계가 없는 곳이 거의 없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살신성인의 자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육 체계를 얻기란 참으로 불가능하다. 그들 선교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헌금한 성도들의 마음을 교육의 그릇에 담아서 학교들을 설립했다.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학교의 교육을 통해서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 되어 지기를 소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학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발시키는 근저에는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마음이 있음을 학생들은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채플거부운동을 공론화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행동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아프카니스탄의 여성들의 교육에 대한 방영이 있었다. 탈레반 정권 이래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상실한 여성들의 한 맺힌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대학은 지성의 최고봉이다. 모든 지성은 봉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혜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겠다..

20041교회연합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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