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0. 10:40ㆍ선교칼럼
광야를 이긴 사람들
조귀삼(한세대 교수)
광야란 땅이 너무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땅은 어딜 가든지 산에는 숲이 우거지고, 들에는 물이 넘치므로 광야를 설명해 봐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광야의 체험은 구약 백성들의 출애굽의 길을 따라 이집트와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의 골짜기들을 가다 보면 분명히 경험하게 된다. 드넓은 대지를 금방이라도 태울 듯한 강렬한 태양빛, 끊임없이 달려도 풀 한포기 보일 것 같지 않는 척박한 대지, 때로는 심하게 휘몰아쳐오는 모래폭풍을 경험하다 보면 광야의 위력을 알게 된다. 그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광야란 땅은 땅이되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생존하기에 부적절한 땅이다. 필자는 선교사였기 때문에 많은 시간들을 혼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어느 목사님께서 “조 목사의 광야는 왜 이렇게 긴가?”라고 염려해주었던 말이 광야를 보면서 생각이 났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광야를 지나온 백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종 되었던 애굽땅을 나와서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생명을 연명했다. 낮에는 무서운 태양을 가릴 구름기둥을 주셨고, 밤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밝힐 불기둥으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광야란 이스라엘에게는 “시험의 날(시 78,95,107)”이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서만이 저들이 생존할 수 있는 법칙을 가르쳐준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광야를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신앙교육의 효과가 있다.
오늘날에도 광야 속에서도 생존해 가는 것들이 있다. 먼저는 우리나라의 아카시아과에 속하는 싯딤나무이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싯딤나무는 광야의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산재해 있다. 아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나무이지만 광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은신처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광야의 사람들은 비록 싯딤나무가 수명을 다해서 나뭇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해도 결코 없애 버리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부류는 양과 염소를 먹이면서 살아가는 족속인 “베드윈”이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광야의 이곳저곳을 순회하면서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을 찾아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고 있다. 한곳에 정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지나친 욕심이 없고, 욕심이 없기 때문에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손님을 대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그들의 마음은 광야에서 순례적 삶을 사는 생활 방식 속에서 나온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쓰는 선교사들을 “광야를 이긴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선교사역은 인생에 있어서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다. 세계선교 앞에서 선교사는 수없이 많은 광야를 만나게 되어있다. 때로는 정치불안의 광야, 때로는 경제불안의 광야, 때로는 문화의 벽을 넘어야 할 광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가 이러한 외부적 요인 앞에서 주저앉아 버릴 때 성령님의 통곡소리를 듣게 될 수밖에 없다. 선교사는 물 없는 광야에서 생존해 가는 싯딤나무의 끈질긴 생명의 영성을 소유하고, 순례적 삶 가운데에서 오는 욕심 없는 베드윈들처럼 소박한 마음으로 세계선교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왜냐하면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자는 광야를 이겨나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한 삶의 소유자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4년 8월 9일, 국민일보 “조귀삼 교수의 선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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