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0. 10:54ㆍ선교칼럼
버려야 할 자민족 우월주의
조귀삼
자민족 우월주의(ethnocentrism)란(ethnocentrism) 자신들의 문화는 문명화된 것이고 다른 문화는 원시적이고 퇴보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는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하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 중에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서구의 선교가 오늘의 선교현장에서 “양키 고 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문화우월주의가 빚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민족 우월주의의 성경적 근거는 요나의 행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사자였다. 하나님은 말씀의 사자(The messenger)인 그를 통해서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 백성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특별한 선교 명령을 내린다.(욘 1:1-2).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명령 앞에서 요나는 부정적인 모습들(욘 1:3,욘 4:3)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의 특권, 배타성, 애국심, 패배의식, 그리고 자민족 우월주의 때문이었다. 즉 그는 이방인인 니느웨 백성이 구원받기보다는 멸망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요나의 자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의 보편성을 보여 주었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욘 4:11)... 사실 요나서의 이방인들(선원, 니느웨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는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다. 선원들은 요나가 물속으로 던져질 위기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요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뿐만이 아니고(욘 1:5,13)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욘 1:14) 하기도(욘1:14) 했다. 또한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욘 2:5-10)하였고 경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입되었다. 따라서 오히려 불순종하고 자만에 빠진 자기 백성보다는 이교도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절대 주권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요나서가 가진 편견적 사고인 자민족 우월주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적 적 선교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회개시키고 순종하도록 강요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처럼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도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명령에 몹시 불쾌한 감정을 가졌고(욘 1:3), 기쁨이 없이 그의 사역을 감당(욘 4:1-5)하였다. 그러나 절대 주권의 하나님은 그를 순종하게 만들었고(욘 1:7) 말씀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그의 마지못한 순종이 결국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장이 열리고 니느웨의 역사에서 사회적, 영적, 도덕적 변화를 일으켰다.
인간들은 누구에게나 자민족 우월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습득하고 경험된 문화를 절대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화를 절대시 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타문화를 열등한 문화로 규정시켜 버린다. 이러한 문화관은 극단적인 배타성을 가진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현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 앞에서 자민족 우월주의를 버려야 하겠다. 선교학자인 로울리는 “요나 당시 유대인들은 진취적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이었고, 밖으로 뻗어 나가는 위대한 선교의 힘을 지니기보다는 사방에 벽을 쌓는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는 이스라엘이다”라고”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은 단일 문화 속에서 형성된 사고체계를 가졌기 때문에 다중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사고들은 선교 현지에서 많은 문화적 충돌을 낳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도 부정적인 요인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21세기를 흔히들 지구촌 시대하고 말한다. 내가 있듯이 다른 것들도 존재하고 있다. 결국 성경적 진리의 타문화 적응을 위해서 자민족 우월주의를 버릴 때에 복음이 문화 속에서 착근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2004년 5월 24일, 국민일보 “조귀삼 교수의 선교 이야기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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