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0. 11:10ㆍ선교칼럼
상생하는 한국
조귀삼(한세대 교수)
우리들 사이에는 이기적인 생각들로 인해서 너무 깊은 골이 생겨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한쪽이 웃으면 다른 한쪽이 울어야 하는 기괴한 세상을 만들어버렸다. 최근 우리는 “수도이전”이라는 국가적 대사 앞에서 헌재가 내린 결정문의 결과를 통해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았다. 이러한 상극의 상황들이 언제까지 존속할지 모르지만 하루빨리 이러한 수렁에서 탈출해야 하겠다.
우리 가운데 참으로 귀한 어휘인 상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위해서 협력을 하자는 것이다. 상생은 동양문화의 원류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우주, 역사, 인간의 기본요소 다섯 가지인 화, 목, 수, 금, 토 사이의 연쇄 고리 중에서 한 조합을 말한다. 이러한 상생은 다음과 같은 일정한 원리를 갖고 있다. 첫째는 사물 사이의 기본관계가 각각 자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는 관계성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 그렇듯이 한 요소는 그 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 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데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셋째는 따라서 상생은 신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상생이란, “나의 것을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 다른 것도 또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상생을 위해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 존재들인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꼭 같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구분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상생의 삶을 위해서 고통을 받으셨던 한 사람을 보아야 한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죄인들이 지는 십자가를 지셨던 분이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도말하시기 위해서 죄 많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내재한 상극을 상생으로 바꾸셨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 시키셨던 장소이고,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화목을 가져오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상생의 삶으로 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남과 북이 나뉘어서 대회조차 되지 않는 상극, 동과 서가 나뉘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상극, 세대와 세대가 나뉘어서 대화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극,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상극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상극의 벽 앞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상생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2004년 10월 국민일보 “조귀삼 교수의 선교이야기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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